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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Apr 29. 2024

삶이 힘들지라도

주저앉지 말자

전시 하나가 황망하게 캔슬되었다.

ㅇ요일에 디렉터와 통화했을 때만 해도 전시 차질 없이 진행될 거라고 했었는데, 3일 뒤인 ㅇ요일에 이유도 없이 전시가 미뤄졌다는 내용의 연락을 받고 황당하여 전화를 했지만 받질 않았다. 문자를 남겼더니 돌아온 답변이 ㅇㅇ ㅇㅇ로 ㅇㅇ ㅇㅇ에 들어가게 돼서 0월 전시가 0월로 미뤄졌다고 했다.


작업실 메이트가 실망하지 않았냐며 내 걱정을 해왔지만 난 되려 덤덤하였다. 디렉터의 일 처리 방식 때문에 해당 갤러리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만약, 취소 연락에 작가 이름을 정확히 적고, 0월 전시가 ㅇㅇㅇ ㅇㅇ ㅇㅇ로 ㅇㅇㅇㅇ를 해야 해서 0월로 미뤄지게 됐다. 이 점에 대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며 모든 내용을 명확하게 명시했더라면 난 미뤄진 전시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디렉터는 내 일의 진행 속도도 파악도 하지 않은 채 메일 내용을 복사 붙어 넣기 해서 전달했다. 이러한 태도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미련조차 생기지 않았다.


작가에게 전시는 왕왕 캔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갤러리들은 신진 작가들에게 꽤 잔인한 편이니까. 그러나, 취소하는 과정에서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상황에서조차 의사소통이 느리다는 점이 나를 힘들게 했다. ‘명확성’의 부재로 인해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명확함.


예전부터 나는 명확한 것을 좋아했다. 명확하지 않고 불투명한 것들은 예민하다 싶을 만큼 싫어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믿음, 애정, 사랑에 대한 것들을 커플 아이템을 통해 원초적인 방법으로 확인했다. 이 부분은 나의 좋지 않는 부분이어서 불확실함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나라도 상대를 대할 때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대하면 돼,’라고 생각하며 바꿔나갔다. 그러나 이 다짐조차도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해서 전부 어그러지고 있다.


친했기에 소중해서 배려했던 것도, 이용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얽히고설킨 관계라 최선을 다해 조율로 인한 해결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잘못된 워딩으로 논점을 자꾸만 흐려대던 그들의 태도를 보며 하나 둘 관계를 정리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심각한 현타가 왔다. 습관성 사라짐이 스멀스멀 올라와 핸드폰 번호를 바꾼 후 지구 끝으로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언니, 나의 배려가 때로는 인간관계에서 독이 되는 것 같기도 하는 것 같아. 처음에는 나의 배려를 당연히 여기지 않던 이들도 익숙해지면 네가 착하니까 참아라는 식의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네. 그래서 너무 지친 것 같아.”


라는 말에 작업실 메이트 언니는 강경하게 말했다.


“은성아, 너 요즘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터져서 너의 안 좋은 습관이 다시 나오는 것 같아. 너 모든 일을 네 탓으로 돌리는 거 가학이야. 안 좋아. 여기서 확실하게 해. 너는 사람 보는 눈이 나빴다. 그 외의 것들은 네 잘못 아니야. 그건 곁에서 실시간으로 널 지켜본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야.”


냉정하디 냉정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 그들을 잃은 대신 얻은 이들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니 그걸로 됐다. 전시 취소 건도, 인간관계도 잃은 만큼 채워지는 것들이 많으리라.


명확함이 부재된 시간들 속에서 나는 또다시 길을 잃고 방황했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 편인데, 납득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헤매느라 소중한 사람에게 꽤나 감정적으로 굴었다. 여유가 사라진 김은성은 이렇게나 몹쓸 인간이다.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지, 감정적으로 약해져 있을 때는 소중한 이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여 그를 할퀴지 말자, 다짐하였다. 이렇게 배운 것이 하나 더 생겼다.

또, 내가 힘든 일을 겪고 있으니 법적으로 금전적으로 물심양면 도움을 주는 든든한 아군들이 있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았다. 누군가는 쉬이 가질 수 없는 것인데 나는 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가진 것에만 집중하여 행복을 느끼면 된다.


법적 공방을 하느라 지쳐버린 월요일. 맛있는 한우를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혼자 마시는 맥주가 큰 위로가 된다. 하고 싶은 말을 뱉기보다 삼킨 나날들이었지만, 청량감 넘치는 음료와 함께 그저 삼켰다.


그래, 살다 보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는 법이지. 그것에 얽매여 꼬꾸라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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