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생계형 요리사는 오늘도 삶을 요리한다
1. 생계형 요리사
"미국엔 왜 갔어요?” 단순하고, 공격 의지 없는 무해한 물음에 불쑥 눈물이 나왔다. 인생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2014년과 다르게 유난히 반짝거렸던 그다음 해. 이상하리만큼 원하는 건 손쉽게 이뤄졌다. 반년 만에 퇴사 후에 차린 영어 전문 공부방에서 월 천오백씩 순수익이 났다. 매입해 둔 택지에 건물 올려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하려던 때, 남편이 제동을 걸었다. 시어머니 병환이 깊어져 미국으로 가야 한댔다. 그때 내렸던 미국행 결정을 아직도 가끔 후회한다. 십오 년간 한 길만 걸어서 일궜던 터전을 버리기로 했던 그 결정이 이토록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지 그때는 몰랐다.
남편이 나고 자란 나라이니 별문제 없을 거로 생각했다. 영주권 있고, 의사소통 문제없고, 정착금 두둑하게 챙겨왔으니, 뭐가 문제겠는가. 9개월간 수입은 없는데, 소비 수준은 그대로였으니, 택지 팔아 만든 정착금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석사 부부인 우린 시시한 일자리가 눈에 차지 않았다. 통장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현실을 직시했다. 2016년 네바다주 최저시급은 8.25불이었다. 최저 임금 주는 시간제 일자리에서도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한국에서 따온 석사학위 따윈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우울해지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요리하는 시간만큼은 행복했기에 2016년 4월, 컬리네리 스쿨에 등록했다. 첫 쿼터 마치자, 담당 셰프가 요리 경력이 전혀 없는데 윈 호텔과 패리스 호텔 총괄 셰프에게 추천했다. 최종 합격한 패리스 호텔에서 셰프복과 기다란 모자를 받던 첫날, 페이스트리 셰프를 꿈꿨다. 그 꿈이 깨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메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 내에 똑같은 디저트를 대용량으로 만드는 일을 무한반복 했다. 생크림 가득 찬 100리터짜리 들통을 번쩍번쩍 들어올려야 하는데, 체력도 따르지 않았다. 거대한 기계 안에 작은 부품이 된 기분이었다.
호텔을 그만둘 때, 주방일은 다시 안 할 줄 알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맘과는 달리, 벌써 6년째 생계형 요리사다. 끓는 기름에 데인 화상 자국은 검버섯처럼 변해 양팔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손가락 마디마디엔 칼질로 생긴 굳은살이 자리를 잡았다. 펜보다 칼이 더 익숙해져야 했던 그 시간. 지시를 내리던 관리자에서 열 살 어린 셰프 말에 순종해야 하는 라인쿡이 되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가 되자 대학원 동기들과 연락을 끊었다. 책도 안 읽는 무식한 동료들 때문에 나도 같이 무식해진다며 투덜댔다. 나를 얕잡아 봤던 그 눈으로 함부로 타인의 삶도 얕봤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들을 가소롭게 여겼다. 나도 그들도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냈을 뿐인데.
여전히 마음 한구석 창피하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노동 값으로 우리 세 식구 쉴 집,
먹을 음식,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차와 기름으로 바꿨으니, 감사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직도 과거의 영광을 다 털어내지 못했나 보다. 입으론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속내는 달랐다. 업이 바뀌었다고 사람이 가진 고유한 가치도 함께 사라지던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걸 가치라 부를 수 있던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