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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Aug 19. 2019

류블랴나(Ljubljana)는 어디에 있는가

in Slovenia

  파울로 코엘료의 책,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Veronika decides to die)』의 배경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이다. 너무나 예측가능하고 뻔한 삶에 싫증을 느낀 스물 네 살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하고 수면제를 네 통 들이킨다. 약이 몸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옴므(Homme)라는 프랑스 잡지를 뒤적인다. 컴퓨터 게임에 관한 어떤 르포 기사에 눈이 박힌 그녀. 기자는 한 가지 질문으로 기사를 시작한다. “슬로베니아는 어디에 있는가?”     

[그림출처: YES24]

  이 정도면 뜬금없다.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왜 하필 그녀는 “슬로베니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기사를 읽는가. 도대체 컴퓨터 게임에 관한 기사와 슬로베니아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책은 대답해준다. 그 게임은 인건비가 가장 싸다는 이유로 슬로베니아에서 제작되었다고. 인건비가 싸다면 중국도 있고 인도도 있고 동남아시아도 있는데 굳이 슬로베니아다. 아무튼 슬로베니아 국민들은 파울로 코엘료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슬로베니아를 구글링 해보았을 것이다. 무료홍보 치고는 효과가 어마어마하다. 당신은 슬로베니아를 아는가? 그것은 마치 모리셔스나 벨리즈같은 느낌일까. 나라인지 도시인지도 모를, 와인 브랜드 같기도 하고. 이국에서 코리아라고 했을 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외국인을 만났을 때의 분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시계 방향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이탈리아에 둘러싸여있다. 올드한 세대들은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를 알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991년부터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분리되었다. 원래 한 나라였지만 이제는 서로 분가해 각각의 독자적인 색상을 띈다. 물가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사는 수준도 다르다. ‘꽃보다 누나’로 인해 유명해진 크로아티아는 사실 물가가 비싼 편이다. 아드리아해를 보더라도 몬테네그로에서 보면 같은 바다를 더 저렴하고 덜 붐비게 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가기 전에 나는 슬로베니아 땅을 밟아야 했다. 물론 그 때 슬로베니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런데 수도가 류블랴나(Ljubljana)라고 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꼭 가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너무나 예쁜 책표지를 보면 충동구매를 하고 마는 것처럼 류블랴나라는 발음에는 예쁠 것이라는 선입관이 들어있었다. 찾아보니 슬로베니아어로 ‘사랑스럽다’라는 뜻이란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나는 사랑스러운 도시로 떠났다.     


  류블랴나는 작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보다는 소도시 느낌이다. 내가 묵었던 숙소는 시내 중심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는데 액자를 닮은 창문 밖으로 작은 강이 흘렀다. 도시는 자유롭고 안전하다. 사람들은 잘 웃고 친절하고 소박하다. 거리의 벽은 그라피티 예술로 치장되어 있다. 재래시장에는 크고 후즐그레한 옷들이, 그래서 눈길을 끈다. 농약을 단 한 번도 치지 않았을 것 같은 크기와 모양이 제멋대로인 야채나 과일을 보면 사먹고 싶은 유혹이 인다. 청포도나 반 잘라 놓은 수박 위에 참새가 내려 앉아 쪼고 있어도 훠이훠이 쫓아내지 않는 주인을 보면 너그러움과 함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배운다.     

  도시에서는 지도를 들고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구글 검색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길을 잃더라도 돌다 돌다 보면 지나갔던 곳에 도착하게 된다. 딱히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낯설어할 필요도 없다. 여행을 가면 꼭 무엇을 하려는 것 보다 무엇을 하지 않으려는 게 더 어렵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시간도 필요하다. 별 목적 없이 발걸음을 끌다 보면 삶이 길바닥에 펼쳐진다. 사람들이 더 잘 보이고 사물들도 더 뚜렷해진다.     


  그래도 가 보아야 할 곳이라면 시내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프레셔르노프 광장(Presernov Square)이다. 사실 걷다보면 지나가게 되어 있지만 말이다. 슬로베니아 국민시인 프레세롄(Preseren)을 기념하는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동상 아래에서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거나 담소를 피운다. 동상은 어디에나 있지 않나. 그렇다. 그러나 프레세롄의 시선을 따라 가다보면 얼마 못가 어떤 건물, 이층쯤이었던가, 창문 사이의 벽에 한 여인의 부조가 있는 것이 보인다. 율리아라는 여인이다. 평생 동안 서로 사랑했지만 신분의 벽을 극복하지 못했던 그들이 지금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역시 스토리가 있다. 시간이 허용된다면 류블랴나 성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봐도 좋다. 그렇다고 체스키 크룸로프를 기대하지는 말자.     

  책 제목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이니 소설 좀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제목으로부터 이미 추측할 것이다. 결국 베로니카는 살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그도 그렇지만 베로니카 살기로 결심하다, 라는 제목보다는 덜 간절해 보여 마음이 놓인다. 산다는 건 죽는다는 것보다 얼마나 치열한 일이던가. 그 치열한 과정이 너무나 뻔하고 심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죽기로 결심한 베로니카를 살리는 방법은 삶의 재미를 설명하는 것보다 막연히 죽을 수 있다, 라는 가능성을 바로 며칠 안에 죽을 수 있다, 라는 자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단순할 수도 있을 명제를 아름다운 언어로 녹여내는 저 소설가는 과연 천재다.     


  책을 읽는 내내, 무엇보다도 스물넷의 베로니카가 더 없이 사랑스러웠던 것은 그녀가 류블랴나의 베로니카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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