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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un 07. 2020

서로 다른 자아로 인해 혼란스러울 때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말할 때마다 주로 언급되는 작품은 로버트 L.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주는, 역시 고전이다. 흘러가는 이야기나 전해 들은 형태로 우리는 그 작품의 주제를 알거나 아는 척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역시 이중성이라는 매커니즘이 작동한다. 이쯤되면 이중성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간 고유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그림출처: YES24]

  이중성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러하다.

‘하나의 사물이 지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뭐 우리 주변에는 그런 게 꽤 많다. 그런데 사람에게 비유하면 비난의 의미로 읽혀지는 게 대부분이다. 너 참 이중적이다! 이런 말 듣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다.     


  이번에는 양면성을 찾아보자.

‘한 가지 사물에 공존하는 서로 맞서는 두 가지의 성질’


  이중성과 의미에 있어 거의 유사해 보인다. 그럼에도 좀 편안한 느낌이 든다. 그 사람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 라는 말. 좀 매력적으로도 들린다.     


  양면성들이 세 개 이상 되면 다양성이라 불릴 수 있다. 어찌 좀 복잡해 보인다. 다중인격자라는 말은 거의 욕에 가깝다.


다양성: ‘여러가지 양상을 가진 특성’     


  그렇다면 다양성과 대치점에 있는 단일성은 어떨까.

단일성: ‘다른 것이 섞이지 않고 단 하나의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성질’

 

 주체적, 독립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좀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제껏 열거한 속성에 대한 예문들은 편협성을 피할 수 없다. 가령, 그 사람 참 다채롭다, 라고 말하면 다양성도 긍정적이 될 테고, 그 사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사람이야, 라고 말하면 일관되면서도 변치 않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중성, 양면성, 다양성, 단일성 등은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다. 상황에 따라 업적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할테니.     


  그래도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을 이중성보다는 양면성이라는 말로 이해할 때 그를(혹은 그들을) 더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다.     


  지킬박사는 저명한 의학자이다. 그는 청년기부터 따라오는 본능적인 악마의 쾌락을 억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번민을 느낀다. 그가 선택한 길은 특수약을 제조, 복용함으로써 향락과 악으로 자신을 무장해 마음 속 본성대로 살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자아 하이드가 탄생했다. 약을 복용하면 선한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일그러진 악한의 얼굴로 변모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몸집은 더 왜소해지고 작아지는데 아마 육체적으로 인격적으로 덜 성장한 청년기의 모습을 시사하는 듯하다.    

 

  하이드는 악한 본성에 충실해 어린 소녀를 무자비하게 짓밟기도 하고 템즈강변에서 상원의원 커루경을 사소한 이유로 살해한다. 쾌락이 악덕을 마음껏 발산하고 난 후에는 안전한 자기 방으로 피신하면 그만이다. 다시 약을 먹고 지킬박사로 돌아오는 것이다.     


  문제는 악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맛본 – 선악과를 따 먹은 이브처럼 원죄가 생겨나 - 그는 특수약의 도움 없이도 수시로 하이드로 변신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악한 본능의 승리다. 이제는 선악의 균형을 맞추고자 지킬박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약이 필요하다. 게다가 약의 원재료인 ‘이상한 물질이 섞여 들어간 그 소금’을 더 이상 조달받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지킬박사의 몸뚱이로부터 빠져나와 하이드가 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제는 다시 지킬박사의 몸으로 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죽음에 이른다. 

    

  선악의 투쟁은 인류 역사에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을 한 인간에게 국한하여 대비시켜 말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지킬박사는 선한 사람, 하이드는 악한 사람, 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은 곤란하다. 지킬박사는 바로 우리들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그리 살려 한다. 그럼에도 마음 속에 이는 쾌락에 대한 충동, 본능적인 것에 대한 열망, 나쁜 것에 대한 미혹으로 번민하고 고뇌한다. 일부는 속세를 떠나 수도승으로 살려 하고 일부는 정신수련을 통해 욕망을 거세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접근해보면 하이드는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 살아보려는 지킬박사의 욕망이 만들어낸 충동성이 강한 또 다른 자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자아가 있다. 혼자 있을 때의 자아, 가정에서의 자아, 직장에서의 자아, 친구 관계에서의 자아,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자아 등등. 새로운 자아를 드러내는 것도 능하고 고유한 자아를 숨기는데도 일정한 능력을 보이는 게 인간의 특징이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 후에 혼자 있을 때의 자아와 배우자와 함께 있을 때의 자아가 똑같기 때문에 사랑이 변하고 열정과 신비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방귀 트는 행위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쁜 것인가.     


  한 가지 자아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고 편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는 않다. 우리 안의 수많은 자아가 충돌할 때 그 때마다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상처받을 것인가.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자아가 다른 자아에게 건네는 위로인지 모른다. 이해하고 인정하고 어루만져주고 이끌어주고. 그러다 보면 그나마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자아가 우리 삶을 좀 더 큰 면적으로 차지해 삶을 조금이라도 더 담백하게 살아가게 할수도 있겠다. 그 땐 더 편안해지겠지.     


  두 가지 자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지킬박사의 말을 들어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내 의식의 저변에서 투쟁하고 있는 천성적인 선한 면과 악한 면 모두가 나의 성격의 일부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당연히 두 가지 모두가 나의 본성이기 때문일세. 오래전부터 나는 이 두 본성을 분리하면 어떨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왔어. 나의 연구 성과로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네. 만약 선과 악이라는 두 본성을 각각 독립된 주체로 분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이 고통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사악한 본성은 그와 대립하는 선한 본성 때문에 후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 테고 반면 선한 본성은 사악한 본성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거나 후회할 필요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식으로 두 본성이 계속 아무 걱정 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네. 인간의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서 너무 다른 선악의 쌍둥이가 한 탯줄에 묶여서 투쟁해야 한다니. 이건 인류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이 아닌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지킬은 극도로 불안에 떨면서도 탐욕스러운 태도로 하이드와 모험을 계획하고 즐거움을 나누었어. 반면 하이드는 지킬로부터 벗어나면 이전 모습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네. 그저 적에게 쫓기던 자신이 숨을 수 있는 동굴로 기억했지. 지킬이 근심이 가득한 아버지라면 하이드는 무심한 장난꾸러기 아들이었어. 지킬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동안 은밀하게 누려 오다 최근 들어 마음껏 즐긴 쾌락을 전부 포기한다는 뜻이었고, 하이드를 선택한다는 것은 수천 가지 관심사와 열정을 포기하고 영원히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으면서 외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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