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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y 17. 2020

의미 없는 순간들을 견디지 못할 때

-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의 글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말하는 작가라고.     


  호불호가 있겠지만, 그를 만나지 아니하였다면 몰라도 일단 그를 한 번 만나면 다시 만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를, 그의 글쓰기 방식을 사랑한다.     


  재작년 가을날 해질 녘 즈음 어느 익숙한 공원 계단을 내려올 때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생각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건 충격이었다. 살면서 나는 늘 특별하게 살려 했고 진부한 세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떨어뜨린 사람이라 자인했다. 그러나 그게 깨졌다. 내가 추구해왔던 삶과, 내가 추구하려는 삶이 그리 유난하지 않다는 깨달음은 실로 신선했다. 많이 가벼워졌다. 어차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낙하 속도가 중력의 개념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니 가볍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이 아님도 알았다. 마음의 짐을 덜어 홀가분해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 피투성((被投性). 벌거벗은 실존에 무언가의 의미 있는 ‘나다움’을 채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나를 나로서 규정하는 것. 이러한 유의미한 생의 작업이 개인의 개별성을 도드라지게 해준다. 만일 원목 그 자체가 실존의 상태라면 의자가 되거나 책장이 되는 것은 개인의 선택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실은 그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그냥 어떤 형태로 상징되거나 채워나가는 권리를 부여하지 말고 만들어주고 명명해주면 그대로 살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신에 대한 무한적인 복종과 믿음으로 개개인의 본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냥 살면 되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더 특별하고 다른 존재로서의 본질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유의미함이 우리의 목을 조를 수 있는 것은 좀 더 근사한 차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개인의 주체성이나 단 하나뿐인 자아로 규정하는 민주주의로 진보된 사회의 강요와 규범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림 출처: YES24]

  밀란 쿤데라의 『유의미의 축제』는 이 점을 주목한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이 외려 존재의 본질이라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선택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 이미 무의미의 논리의 출발점이다. 부잣집에 태어나거나 남자로 태어나거나 체코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고를 수 없다는 것은 역으로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사회의 우위를 획득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한낱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당위성이 된다. 로또 당첨과 무당첨이 어디 의미 있는 일이던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존경할 필요도 없다. 다 무의미가 벌인 축제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고위층이니 높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저마다 하는 일이 다를 뿐 의미 없을지도 모를 개인적 삶의 선택에 불과하다. 기껏 양보하면, 어떤 정책을 결정했을 때의 영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는지 미치지 않는지가 기준이 될 뿐이다. 지배층-피지배층의 도식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지배받는다 말인가. 역설적으로 선거 등을 통해 어떤 이를 사회에 영향을 더 많이 끼치는 자리에 올려놓는 힘을 보여주는 자들이 지배층이 아니던가. 그래서 낮고 높음을 가리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격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인간 사회에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서 작가는 배꼽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자의 엉덩이, 허벅지, 가슴 등이 특정 여인의 개별성을 인지하고 구별하게 하는 성적 매혹이라지만 배꼽은 대개 저마다의 차별성을 나타내 주지 못하는 것으로서 인류 공동의 숙제인 종족 보존의 상징물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개별성이 없는 성적 메시지는 - 배꼽을 드러내는 여인의 모습은 섹시하게 비쳐질 테니깐 – 결국 생명 탄생이라는 집단적 연대감을 심어줄 테니. 공정한 평등 말이다.     


  그러니 차이나 우월, 열등감, 독특한 자아, 나르시시즘 같은 것은 배꼽 앞에서 모두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무의미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옴팡 들어가 때가 살짝 낀 배꼽을 인정하면 풍만한 가슴으로부터 감사함을 배울 수 있듯이.     


  배꼽에 대해 알랭은 이렇게 말한다.     


  “허벅지, 가슴, 엉덩이는 여자들마다 다 형태가 달라. 그러니까 이 황금 지점 세 개는 단지 흥분만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고, 그와 동시에 한 여자의 개별성을 나타내 준다고. 사랑하는 여자의 엉덩이를 못 맞힐 수는 없잖아. 수없이 많은 엉덩이 중에서도 자기가 사랑한 엉덩이는 알아볼 것 같아. 그렇지만 배꼽을 가지고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배꼽은 다 똑같거든.”(중략)
 “이 네 가지 황금 지점은 각각 하나의 에로틱한 메시지를 나타내. 그러면 배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에로틱한 메시지는 뭘까?”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해.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뭐에 대해서?”
 “태아.”
 “태아라, 그렇지.” 라몽이 인정했다.
  그리고 알랭이 말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라몽은 의미 없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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