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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r 29. 2020

삶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을 때

- 프랑수아즈 사강의『슬픔이여 안녕』 -

  영화 <최종병기 활>에는 이런 명대사가 있다.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사실 그러하기가 쉽지는 않겠다. 두려움을 앞에 두고 벌벌 떠는 것이 인간적이다. 눈을 부릅뜨고 두려움을 직시하여 정면 돌파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 어디 좀 영웅적인 면을 갖춘 위인들에게 해당되는 특성은 아니던가. 범부에게는 그저 가당찮은 말일 수도 있겠다.   

  

[그림 출처: 다음]

  그러나 꼭 그러하지는 아니하다. 실존적인 태도를 가진 그대는 당당하게 두려움 따위는 직시할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의 주인은 당신이다. 당신 앞에 나타난 두려움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해결 가능하고 시쳇말로 존버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 마냥 두려워하지 말고 직시하여 문제점을 알고 해결책을 모색할 때 우리는 극복해낼 수 있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림 출처: arte]

  프랑수아즈 사강의『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에서의 안녕, 은 봉주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만날 때 하는 인사이다. 만일 이별의 인사였다면 아듀(Adieu)라고 하지 않았을까. 원제가 이래서 중요하다. 한국어 제목만 보면 깜박 속기가 쉽다. 그래서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유과정인 슬픔을 잊고 떠나보내자는 이별의 의미가 아니다.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의 가사처럼 - 나이는 숫자 / 마음이 진짜 /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 왔다갈 한 번의 인생아 - 카르페 디엠이나 욜로(Yolo)를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외려 슬픔을 맞이하는 과정이다. 책은 17세 여주인공 세실이 자신이 꾸민 책략에 대한 일정한 분량의 죄책감과 미안함, 아릿아릿한 감정을 동반한 슬픔이라는 감정에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는 과정을 그린다. 일정한 분량이 아니고 담담하지 않았다면 아마 책 제목은 떨쳐 보내려는 의미인 『슬픔이여 안녕, Adieu Tristesse』이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책은 <최종병기 활>의 두려움을 직시하는 주인공의 결연에 찬 태도와 그 결이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림 출처: 인터파크]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그리고 책은 이렇게 끝이 난다. 처음과 마지막 문단. 슬픔의 사전적 의미로서 이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이 또 있을까.     


  다만 파리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만이 들려오는 새벽녘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때때로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그해 여름과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은 1935년 프랑스 남부 카자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04년 그녀의 육신은 카자르크에 안치되었다. 카자르크. 마치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지방의 어느 지명 같은 곳. 카자르크라는 곳은 돌연 내게 하나의 의미 있는 이름이 된다. 언젠가 때가 되면 프랑스 남부 여행을 하고 싶은 계획이 있는데 그 때 카자르크에도 들릴 것이다.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wanna가 아니라 will이라는 의지의 조동사 쯤 될 것이다. 카자르크는 곧 사강일터니. 이렇게 지구촌 어느 장소, 위도가 경도가 만나는 하나의 작은 지점이 새로운 인연이 된다.    

 

  사강의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 부르조아적이고 보수적 가풍의 집안답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작품의 저자로 쿠아레라는 가문의 성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필명의 성은 사강. 사강이라는 가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재미있는 것은 사강이라는 인물이 사강공작인지 아니면 사강공작부인인지 애매모호하다는 것. 실제 그녀의 다른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작품의 등장인물을 보면 여자는 폴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는 로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나’라는 정체성만 확보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의미가 없는 건가.     


  말이 나온 김에 그녀의 다른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역시 굉장히 매혹적인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2013년 2월 5일에 읽었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는 것은 책 안표지에 읽은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 덕이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이런 문장도 적어두었다. 짧은 문장 덕에 나는 저 책이 삶의 권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책임을 기억한다.

‘시몽은 또 여자를 만나겠다. 그 땐 브람스 타령이 아닌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편안해지겠지. 폴처럼... 로제처럼... 익숙함과 권태로움으로.’     

[그림 출처: 인터파크]

  프랑수아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사강이라는 필명을 선택했듯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은 사강의 작품으로부터 자기 이름을 가져온다. 즉 쿠미코라는 본명보다 소설 속 여주인공 조제, 라는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는 것이다. 조제라는 이름은 사강의 또 다른 작품 『한달 후 일년 후』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데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품절이라 읽어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영화 속 조제는 사강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제나 사강이나 삶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이 그냥 익숙한 습관 같은 것,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아닌 건지. 그러면서도 두 여자는 자신의 삶에 확고한 주인의식을 가진다. 별 볼일 없을지는 몰라도 자기 방식대로 묵묵히 나아갈 것.     

[그림 출처: 다음]

  나는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김영하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책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의 독서습관 때문인데, 그 때 누락된 『슬픔이여 안녕』은 지금 읽게 되었으니, 오늘 밤에는 아마 다시 조제를 만날게 될 것이다. 어차피 그렇게 인생이라는 것은 나른하고 반복적일터니.     


  자동차 속도에 광분하고 알코올에 중독되고 약물에 취한 사강의 삶은 빠르고 자극적이고 현란하고 환상적일이었을 것이다. 사강은 실존적인 삶을 살아내려고 했다. 어차피 한 번뿐인 삶, 제대로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한 것이다. 그래봤자 허무와 권태로 가득한 포커 치는 방 안의 자욱한 담배연기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라는 현실과 마주쳤겠지만, 그래도 부닥치며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마약을 소지했다는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섰을 때 사강은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림 출처: 인터파크]

  이것보다도 더 호랑이같은 태도가 또 있을까. - 어, 가만있어보자,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 고 조제는 말했었는데 조제도 호랑이처럼 독립적이고 싶었던 걸까. -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이 슬픔조차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살아가듯이 삶에 대한 주체적 권한은 오로지 개인 고유의 영역으로 남는다.     


  책 속 세실이 자신의 삶에 주인임을 선포했듯이.     


  어떻게 해서든 분발해서 아버지와 나, 우리의 지난 삶을 되찾아야 했다. 내가 최근까지 영위해 온 유쾌하고 불안정한 이 년, 지난번 내가 그토록 재빨리 부정해버린  그 이 년이 갑자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매력적으로 비치다니……? 그 생활에는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스스로 내 삶을 선택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나는 점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점토는 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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