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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ul 19. 2020

사랑은 대개 진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을 때

- 밀란 쿤데라의 『우스운 사랑들』 -

  틀니를 꼈다고 해서 키스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모양새가 좀 떨어질 수는 있지만 사방으로 흔들리는 치아로부터 일정한 재미와 율동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게 신경 쓰인다면 빼 버리면 될 테고 그도 아니면 가벼운 입맞춤에 집중해도 될 것이다. 건강한 치아만이 혹은 임플란트만이 키스의 절대조건 일리는 없다. 키스도 마음의 문제이다.     


  밀란 쿤데라의 『우스운 사랑들』은 이처럼 약간은 마음의 부담이 작용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일곱 꼭지의 단편모음집이다. 그리고 그는 제목을 『우스운 사랑들』이라고 명명한다. 시쳇말로 그는 참 오지게 제목을 잘 정한다. 그의 제목에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혼재한다. 삶을 진중하게 살아내면서도 가볍게 바라보려는 작가의 철학이 녹아있는 듯하다.     

[그림출처: YES24}

  그런데 맞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건 원래 좀 유치하고 우습다. 낭만적이거나 열정적이거나 점잖거나 화려한 사랑들도 존재하지만 사랑이 영글어 정착하게 되면 우스운 사랑들로 변신한다. 물론 두 가지 이상의 성격을 가진 사랑이 공존할 수도 있다. 사랑이 우스울 수 있기에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사랑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 늘 무거운 돌과 같은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에 질릴 수도 있다. 우습다고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다. 우습다고 사랑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 분)는 은수(이영애 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상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너무 아프다. 사실 은수의 사랑은 변한 게 아니라 사라져버렸다고 말하는 게 맞다.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사람이 변했다고 하는 게 맞다. 사랑은 저 혼자 움직이며 사람을 지배한다. 구조주의적 성격이다. 만일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이 우스운 사랑으로 변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나름 행복했을 것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여전히 애절하다.     


  여기서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다 소개하는 것은 무리다. 단편이라 해도 그 하나하나는 장편과 같은 완전성을 지닌다. 요절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삶이 부족한 건 아니다. 짧게 살아도 그 사람의 생은 그 자체가 온전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들로 그득한 – 아무래도 체코를 배경으로 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인만큼 – 일곱 편 중에서 더 독특하고 신선한 작품을 하나 뽑아내 본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길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고 역시나 제목이 매혹적이다.     


  이 이야기는 서른 다섯 살 먹은 남자와 쉰 중반의 여자가 15여년 만에 체코 프라하 보헤미아 어느 소도시에서 우연히 재회하면서 시작된다. 보헤미아는 체코 중서부에 위치한 지방으로서 대표적인 도시는 수도 프라하, 필스너 우르켈 맥주 – 현지 발음은 좀 다르다 - 로 유명한 플젠, 중세도시 체스키크룸로프, 역시 맥주 생산지인 체스키부데요비체 등이 있다. 아무튼 프라하에 사는 쉰 중반의 여자는 이 작은 소도시에 안장되어있는 남편의 묘지를 십년 임대받았는데 갱신하는 것을 잊어버려 기한이 만료되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묘지에 분개한 여자와 임대관리인의 생각을 읽어보자.     


  임대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고 그녀가 비난하자 그들은 묘지에 자리도 거의 없고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답했다. (중략) 남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이 두 번째 죽음, 죽은 자로서 존재하는 권리조차 더 이상 가지지 못하는 죽은 지 오래된 자의 죽음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사실 이 부분이 이 소설 전편에 흐르는 주제의식이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더 오래된 과거는 덜 오래된 과거보다 덜 중요하게 취급받는다. 그렇다면 현재(present)는 어떤 위치에 서는가. 현재가 선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재는 과거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제 무언가 떠오를 것이다. 지금이 중요하다, 는 말은 여기서도 또 다시 반복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니 욜로(Yolo)니 아모르 파티(Amor fati)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니 뭐 그런 느낌이다.     


  오랜 만에 만난, 그 때 한 번 사랑을 나누었던 여자에게 남자는 자기 원룸에 가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한다. 커피 한 잔 할래요? 꼬시는 방법은 동서양이 보편적인 코드를 갖는가 보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는 이렇게 말한다. 라면 먹고 갈래요? 그러고 보면 커피는 라면보다 우월하다. 원두를 내려 끓인 커피는 인스턴트 라면보다는 사랑의 향기가 지속될 확률이 높다. 물론 커피-설탕-프림, 3가지가 들어있는 인스턴트 커피는 라면과 동일한 위치를 점할지 모른다. 커피도 라면도 사랑도 인스턴트라면 그리 무거울 필요가 없겠다. 우스운 사랑이다. 만일 영화에서 은수가 상우에게 밥 먹고 갈래요, 라고 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밥은 라면보다 할머니들의 표현대로라면, 근기가 있다.   

  

  여자는 많이 늙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은 여자를 40대 초반에서 50대 중반으로 위치 이동시켰다.  

   

  얼굴에는 주름이 졌고 (여러 겹 분을 발라 아니라고 애써 주장해 봐야 소용없었다.) 목은 시들었으며 (높은 깃으로 감춰 보려 애를 써도 소용없었다.) 뺨은 아래로 쳐졌다. 머리카락은 (아니 이건, 거의 아름다웠다!) 희끗희끗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일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아, 분으로도 화장품으로도 좋아 보이게 할 수 없는) 손이었다. 손등에 불거진 파란 색 혈관들 때문에 거의 남자 손처럼 보였다.     


  머리가 빠져 대머리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남자는 해 놓은 것이 없는, 특히나 제대로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 살고도 그렇게 조금 살았다는 사실에 치욕감을 느낀 것이다. 그 남자, 그래서, 비록 나이의 철망 뒤에 가려져 늙어버린 그 여자에게 여전히 마음을 사로잡힌다. 스무 살에 만난 그 여자는 그때 특별했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제 여자로서의 삶은 포기했다. 대신 업적을 쌓기로 했다. 늙어가고 소멸해 가는 몸 이상의 것들, 즉 사람이 이루어 낸 일이나 다른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주는 업적에 주목한 것이다. 사실 여자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은 어머니를 미망인의 적합한 한계 속에 가두고 여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성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역겨웠으며, 그녀에게 (잠재적 가능성이라 해도) 남아 있을 수 있는 모든 성적인 것을 혐오스럽게 보았고, 성이라는 개념은 젊음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녀에게 남아 있는 모든 젊은 요소를 혐오스럽게 여겼다. (중략)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견딜 수 있도록,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나이 든 어머니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이 자신을 그렇게 무덤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때로 알아차렸지만 결국은 아들 뜻을 따랐고, 그의 압력에 굴복했으며, 심지어 자기 삶은 바로 이렇게 다른 삶 뒤로 조용히 사라짐으로써 아름다워지는 것이라 생각하며 애쓰면서 이 굴복을 이상화하게까지 되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가 나타나 거의 감사하게도, 자신의 젊었던 시절을 기억해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르는 것.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갈망한다.     


  커피 한 잔 할래요, 라는 제안에 여자는 신체적 접촉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자기가 할머니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성숙한 여자가 남자에게 늘 경계해야 할지도 모를 ‘항시적인 준비 상태’를 오래전에 상실한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과거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 그녀는 기겁을 한다. 이것은 분명 우스운 사랑이다.     


  하지만 그가 그녀 입에 자기 입을 대고 혀로 입술을 열려 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이를 꽉 물었고 (입천장에 붙은 틀니 장치가 느껴졌고 그것으로 입안이 꽉 찬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그를 밀어냈다. “안 돼요. 정말로. 제발. 이러만 안 돼요.”     


  틀니를 하고 있을 때 상대방의 입술이 침투하려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글 첫 문단에서 나는 호기롭게도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조금 뒤로 물러나보면, 어쩌면 그것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젊었을 때 사랑을 나눈 추억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떨까. 쉽지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견디기 힘든 모멸감이 들지 모른다. 아름다움은 아름답게 남겨두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 기억 속에서 내게 기념비를 세워 주었어요. 우리는 그것이 무너지게 할 수는 없어요. 나를 이해해 줘요.” 그를 물리치기 위해 그녀는 말했다. “당신에겐 권리가 없어요. 그럴 권리가 없어요.”     


  그러나 남자는 지속적으로 매달린다. 여자는 거부하고 거부하다가 갑자기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강요한 아들의 적대적인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묘지에 대해 질책하는 아들의 화난 목소리도 생각한다. 여자는 갑자기 아들을 향한 분노가 솟는다. 남편이라는 과거에 매달려 여자를 잃어버리게 만든 아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이놈아!     


  그녀는 또 생각한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며, 기념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지금 옆에 있는 남자가 그녀를 기리며 십오 년 동안 숭배한 그 기념물까지도 역시 아무 데에도 소용없으며, 모든 기념물이 다 쓸데없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생각.     


  갑자기 그녀는 그녀를 환하게 비추어주는 빛을 느꼈다. 그 빛은 깨달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길 것. 업적이니 기념물이니 유산이니 뭐 어떤 것이라도 사후 남겨지는 것들을 위해서가 아닌 지금 남아 있는 나를 즐길 것. 여자는 옷을 벗는다.     


  그녀에겐 삶에 우선하여 기념물을 앞에 갖다 놓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자기 자신의 기념물도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 있을 뿐이다. 무시당한 자신의 몸을 위해 지금 그녀는 그것을 악용할 수 있다. 곁에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들고, 젊고, 또 이 남자가 아마도 (심지어 거의 확실히) 그녀 마음에 들고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남자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만이 중요하니까. 그러고 나서 그녀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고 그의 머릿속 그녀의 기념물을 망가뜨리게 된다 해도, 이 남자의 생각과 기억이 그녀 바깥에 있는 것처럼 이 기념물은 그녀의 바깥에 있는 것이며,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어린 시절 나름 감동을 받은 피천득의 『인연』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과거의 추억을 뜯어먹고 살 것인지 현재의 욕망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래나 저래나 삶은 계속되고 지금 이 순간의 만남도 얼마 안 있어 또 과거가 되는 것이다. 현재는 어떤 형태로든 기억으로 자리잡는다. 라떼는 말이야, 는 무조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지금 또 다른 라떼를 끓여보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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