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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an 31. 2021

살아있는 따뜻한 접촉이 그리울 때

-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

  아주 오래 전에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야한 포스터. 외설스러운 느낌. 원제는 <Lady Chatterley's Lover>. 수입배급업체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우리말 제목은 명백히 오역이다. 발음상으로는 차타레가 아니라 채털리가 맞고 (왠지 차타레라는 이름이 더 가볍고 더 문란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lover’는 사랑이 아니라 연인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는 제목을 달아 고맙기까지 하다. 이 경우는 개인적으로 바뀐 제목이 훨씬 편안해 보인다. 

   

  사실 영화 제목의 오역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오역이 영화의 흥행에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이다. 영화를 들여다보면 ‘fall’은 가을이라기보다는 한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 제목이 몰락의 전설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확 구미에 당기는 느낌이 덜하다. <가을의 전설>이라고 번역한 그 사람이 무지로 그랬든 알고서 했든 간에 배급사는 상이라도 주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가 있는데 카르페 디엠으로 유명한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이다. 영화 속에서 ‘society’는 사회가 아니라 클럽, 즉 동아리를 의미한다. 그러하다면 죽은 시인 클럽? 역시 <죽은 시인의 사회>가 훨씬 매력적이다.     


  어찌 되었든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차타레 부인이나 채털리 부인이라는 이름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대부분 ‘코니’라는 애칭으로 불려진다.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은 콘스턴스 리드. 후에 남편 성을 따라 콘스턴스 채털리가 된 것이다. 여기서 채털리라는 성은 중요하다. 그것은 그냥 코니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남편을 따라 상류계급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보통 계급의 여인이 불구가 된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이었다면 이 책은 진작에 출판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로렌스는 죽기 2년 전인 1928년에 이 책을 완성했다. 그리고 1959년에나 되어서야 미국의 그로브출판사, 1960년 영국의 펭귄출판사에서 무삭제판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그림 출처: YES24}

  하기야 우리나라에서 1992년에 출판된 마광수 작가의 『즐거운 사라』가 외설 시비로 음란물로 지정되고 작가에게 유죄 선고가 된 것을 되돌아보면, 서양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훨씬 더 일찍 보장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30여년이나 지나 겨우 출판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노골적인 성 묘사와 음란한 비속어의 사용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줄곧 외설이란 딱지가 붙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것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섹스 묘사를 넘어서 상류 계급의 여인이 불구가 되어버린 남편 클리퍼드 몰래 하층민인 사냥터지기 맬러즈와 바람을 피우고 그 육감적인 사랑에 몰입했으며 아이까지 낳으려고 하는 그 저의에 기존 남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회 지배층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해보는 것이다. 상류층 계급에 속해 있는 남편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가 성불구가 되었으니 아내인 너는 당연히 남편을 섬기며 평생 지조 있게 살아야 하는 게 도리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거기에 음란물이라는 딱지는 이런 생각을 숨길 수 있는 특효약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인데, 뭐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로렌스는 당시 세간의 비평에 맞서 줄곧 자신의 소설 의도를 옹호했다. 자신의 소설은 난잡한 성행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부터 기인된 기계문명, 물질주의,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문명사회로부터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음을 말이다. 실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코니와 맬러즈의 연애 행각 외에도 당시 영국 중부 지방, 셰필드 인근 라그비의 차가운 산업 문명, 돈만 추종하는 인간군상들, 향락만 탐닉하려는 젊은 계층들의 타락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연애소설로 읽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함정도 많이 지닌다. 그것은 작가의 생각과는 달리 코니와 맬러즈의 자극적인 섹스 행위와 함께 이루어지는 대화 때문인 것 같다. 오죽하면 원서를 읽고 싶어질까.     


  이 책을 연애소설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자극적이지만 이 시대의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차가운 섹스 대 따뜻한 섹스, 사랑이 없는 섹스 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섹스, 의무적인 섹스 대 욕망하는 섹스, 섹스를 위한 섹스 대 사랑을 위한 섹스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읽어도 울림이 큰 작품이다.     


  먼저 전자들에 대한 코니의 생각을 들어보자.     


  그가 양 엉덩이를 밀쳐대는 꼴은 그녀에게 우스꽝스러워 보였고, 별 볼일 없는 배설의 절정에 도달하고자 안달하는 듯한 그의 성기도 가소롭게 여겨졌다. 그랬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이다. 궁둥짝의 이 우스꽝스러운 풀썩거림과, 그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성기가 축축하니 조그맣게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이 말이다. 이것이 소위 그 신성한 사랑이라는 거였다! 이런 점에서 결국, 이 연기 행위 같은 짓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들은 옳았다. 그것은 하나의 연기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들이 말한 것처럼, 인간을 창조한 신에게는 좀 고약한 익살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건 정말 사실이었다.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해 놓고 나서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강요하고 또 이 굴욕스러운 연기 행위를 맹목적으로 갈망하도록 내몰고 있으니 말이다. 모파상 같은 사람조차 이것을 굴욕스러운 엿 먹이기로 여겼다. 인간은 이 교접 행위를 경멸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짓을 해대는 것이다.     

     

  다음으로 후자들에 대한 맬러즈의 말을 들어보자.     


  남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성행위를 하고 여자가 따뜻한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잘 되리라고 난 믿고 있소. 차디찬 가슴으로 하는 그 모든 성행위야말로 바로 백치 같은 어리석음과 죽음을 낳는 근원인 것이오. 이 따뜻한 가슴으로 하는 성행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부드러운 애정과 공감, 즉 살아 있는 접촉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그렇소. 바로 부드러운 애정이오. 정말로 말이오. 그리고 그건 곧 씹의 깨달음이오. 성이란 사실 접촉에 불과한 것으로서 모든 접촉 중에서 가장 친밀한 접촉일 뿐이오. 그런데 그 접촉을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소. 우리는 그저 절반만 의식이 있고 절반만 살아 있을 뿐이오. 우리는 온전히 살아서 의식이 깨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오. 특히 우리 영국인들은 서로 간에 접촉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오. 좀 더 섬세하고 좀 더 부드러운 접촉 말이오. 그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오.     

  소설 마지막은 코니를 그리워하는 맬러즈의 편지로 끝이 난다. 그립고 그립다고. 그래도 서로가 합법적으로 이혼하고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그날 까지 기다리겠다고. 왠지 나는 코니가 맬러즈를 버릴 것 같다. 맬러즈는 진짜 사랑하는데 코니는 진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 <인간중독>을 너무 깊이 본 것 같다. 때로는 남자의 사랑이 여자의 사랑보다도 더 비장하기도 하다. 책을 읽어보시길, 그리고 내 생각과 같다면 추천 꾸욱 눌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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