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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un 06. 2021

화를 참지 못할 때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 -

  지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컴퓨터 게임에 푹 빠졌다. 전투 시뮬레이션 게임의 일종인데, 지인의 말에 따르면 허구헛날 총질 한다고 정신없다고 한다. 문제는 게임에 졌을 때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뷔페식 욕설과 함께 순진무구한 키보드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친다고 한다. 그래서 교체한 키보드가 이미 두 개. 평소에는 『인간실격』의 요조처럼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라는데 게임만 하면 그렇게 변해버린다고 한다. 키보드를 다시는 사주지 않겠다고 하고선 다시 사주고 마는 지인의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다.    

 

  그렇다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키보드를 부셔버릴 듯한 그 모습을 본다면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뭐라고 말할까. 세네카의 답변은 이렇다.     


  우리는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대상에게 화를 내지만, 심지어 그런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도 화를 낸다. 후자에는 무생물도 포함된다. 흔히 우리는 책의 글자가 너무 적다고 던져버리고, 책이 잘못 만들어졌다고 북북 찢어버리며,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옷을 찢는다. 우리가 화를 낼만한 일도 아니고 우리가 화를 내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림출처: YES24]

  컴퓨터 전투 게임도 일종의 가상전투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그는 ‘화는 고통을 고통으로 갚아주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라고 정의하면서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의 집단으로서 화를 내는 것은 종종 도움이 될 때가 있고 분노는 사기를 진작시키고 용기를 자극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화는 필요하다. 화가 없으면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 승리를 위해서는 화가 마음을 채우고 정신에 불을 붙여야 하지만, 화를 지휘관으로 삼지 말고 보병으로 이용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또 다른 저작 『수사학』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언급하면서 분노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기도 한다. 이 장면은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전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슬퍼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하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키보드에 펀치를 가하는 지인의 아들을 바라본다면 이렇게 말했을까. ‘그래, 잘하고 있어. 네 분노를 이용해서 다음 게임에서는 적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려라.’ 물론 상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세네카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성과 화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가 이성의 말을 잘 들어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화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져야하고 화가 이성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파괴적이고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다면 이성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화가 이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화가 아니다. 화에는 반항이 기본적 특성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화가 이성에게 반항하고 이성이 명령을 내려도 수그러들지 않고 사나운 욕망에 이끌려 간다면, 화는 마치 퇴각 신호를 무시하는 병사처럼 마음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부하일 것이다.     


  사실 세네카처럼 이성에 기반한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실존적 고뇌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약하다. 약해서 감성과 욕망에 이끌린다. 약하기 때문에 화를 내고 두려움에 떨고 슬픔에 빠지고 술에 취하고 마약에 빠진다. 드라마가 인간사를 흉내낼 수 있는 복제판 같은 것의 하나라면, 드라마 속에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욕망에 이끌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질투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미쳐가고 사랑한다. 세네카적 인간형들만 드라마에 등장한다면 재미가 없어서 아무도 보려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화를 참고 이성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장면들만 봐야 한다면 숨막힐 수도 있겠다.     


  보통 드라마 속에는 분노가 폭발한 주인공이 어김없이 글라스나 컵 같은 것을 던져 산산조각 내며 몸을 떠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그렇지만 철학자 세네카가 드라마를 만든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화가 난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뺨을 때리려는 찰나에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지금 화가 나기 때문에 저 남자의 따귀를 한 대 갈기려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판단을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화가 나의 이성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고 여자는 돌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다보면 남자의 실수를 심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실수 없이 항상 잘 하던가. 나도 실수를 할 때가 있지 않던가.’ 누가 이 도덕 수업같은 드라마를 보겠는가.     


  역으로 이야기하면 그래서 드라마는 드라마다. 시청자들이 욕을 쏟아내면서 보는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한다. 그 욕망의 과정에서 분출되는 수많은 종류의 감정의 찌꺼기들이 배설되는 드라마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을 간접경험 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드라마 같다면 과연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드라마, 특히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인간 군상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아마 세네카를 찾거나 종교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모레 같은, 기껏해야 복길이 할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고부갈등이 전부인 <전원일기>와 같은 프로그램이 그토록 오래 장수할 수 있었던 건 참 기이한 일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그럼 화를 참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네카는 거울을 보라고 했다. 거울을 보면 추악하게 달라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분노가 폭발한 자가 과연 거울을 볼까. 불같은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에게 거울을 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화라는 것은 미리 예방하는 것이 좋겠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화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고 다음으로 화가 났더라도 자중하여 그릇된 행동을 피하는 것이다.     


  화라는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 화가 나려할 때 이성으로 제압할 수 있는 능력. 오직 연습밖에 없겠다. 사실은 생각의 전환이다. 화의 분출은 기본적으로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내가 옳으니 틀린 사람에게 질책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할지니 늘 나도 틀릴 수도 있다, 라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때도 겸손이 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낮은 자세가 유지되어야 한다.     


  화의 최대의 근원은 “나는 죄가 없어.”, 혹은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 뿐이다. 우리는 말로 질책을 당하거나 제재를 받으면 원망하는 마음을 품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원래의 악행에다가 고집과 오만의 잘못을 또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살다보면 화가 날 때가 꽤 있다. 운전하는데 깜박이 없이 갑자기 끼어드는 차, 단점만을 귀신같이 지적하는 직장동료, 돈 많다고 자랑하는 초등동창, 줄을 섰는데 새치기하는 타인, 시댁에 불만을 품는 아내, 집에 오면 낮잠만 자는 남편, 아이돌에게 빠져 공부는 뒷전인 딸, 셔츠에 엎질러진 커피, 내 발을 밟고도 모른척하는 승객 등. 그 때마다 화를 낼 것인가. 그 때마다 화를 표출하여 자신에게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돌려줄 것인가. 도대체 내게 맨날 기쁨을 주는 커피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책의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면서 글을 끝낸다. 화를 내며 살기에는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다.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너무 짧다.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죽어갈지는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자,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숨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덕목들을 소중히 여기자. 그 누구도 두렵게 하거나 위험하게 만들지 말자. 우리는 손해와 부당한 일, 모욕과 경멸 따위로부터 높이 초월해 있음을 보여주자. 잠깐의 불편함은 넓은 마음으로 참아보자.
  우리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어느새 죽음이 지척에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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