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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ul 11. 2021

나도 모르게 설득 당하고 싶지 않을 때

-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

  창밖으로는 신록이 그득하다. 주말에 만나는 카페 밖 장면이다. 약속이 딱히 없는 주말이라면 카페를 찾는다. 창을 마주하고 그 너머 초록빛 나무들을 마주하면 내가 읽는 책들은 소소한 개인사가 된다. 책도 저 나무처럼 생명력이 깃들어 있어 – 그렇게 믿고 싶다 – 책장을 넘기는 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부피가 늘어날 것이다. 손가락과 책장의 살가운 접촉으로 두툼해져가는 물리적인 변화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 함께 성장한다.     


  브런치를 시작한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내 글들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때의 원대한 포부였다. 지금은 그저 쓰고 싶어 쓴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성향의 결이 같은, 삶의 가치가 유사한, 어느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싶어 읽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며 삶 속으로 좀 더 씩씩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카뮈의 말처럼,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으로 카뮈는 시지프스의 끊임없는 반항을 통해 살아간다는 행위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우리들 삶이 강팍하거나 허무하다 생각될 때, 우리는 시지프스처럼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올리는 일을 묵묵하게 반복해야 한다. 부조리하다 생각되지만, 우리는 부조리를 명확히 인식하고 부조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우리 자신의 실존적 태도를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저마다 삶이 있고 사연들이 있다. 삶의 위기가 닥치면 시지프스를 떠올리자. 그리고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보자. 그 바위가 문학이, 예술이, 스포츠가, 재능기부가, 사회적 연대가 될 수 있다. 나에게는 책이, 가끔 쓰는 글들이, 걷는 여행이 바위가 된다. 그대들의 바위는 무엇인가.     

[그림출처: YES24]

  요즈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라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고 있는 중이다. 수사학을 격 떨어지게 이야기해보면 말빨 훈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디 그 정도로 옹졸하고 단순한 사람이던가. 그는 책을 시작하면서 수사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사학은 변증술과 짝을 이룬다. 둘 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지만 특정한 지식 분야에 속하지 않는 주제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 둘에 관여한다. 모든 사람이 얼마쯤은 캐묻거나 설명하려 하고, 자신을 옹호하거나 남들을 비판하려 하니까. 대중 가운데 일부는 되는대로 그렇게 하고, 다른 일부는 버릇이 되어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다. 두 방법이 다 가능하다면 체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분명 가능할 것이다. 습관으로 만들어 성공하는 사람과 되는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이유는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기술이 할 일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 체계적으로 공부하면 논리정연하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 수사학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경우에 가능한 한 모든 설득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그렇다면 설득수단에는 무엇이 있을까. 증거를 찾아 증명하면 된다.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근거를 대는 것은 토론의 기본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강력한 증거는 두 가지이다.     


  증거를 통해 설득하려는 사람은 모두 예증이나 생략삼단논법을 제시할 뿐이고 그 밖의 다른 방법은 없다. (중략) 어떤 명제의 증거가 일련의 유사한 경우에 근거하면 그것이 변증술에서는 귀납이고 수사학에서는 예증이다. 어떤 명제가 참이면 다른 명제도 반드시 또는 대개 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것은 변증술에서는 삼단논법이라 불리고 수사학에서는 생략삼단논법이라 불린다.     

  이해를 돕자면, 예증을 단순하게 말하면 예를 들어 증명하는 것이다. 생략삼단논법은 강력한 효과를 얻기 위해 삼단논법의 전개단계(대전제-소전제-결론) 중 하나를 생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대전제),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결론)이라고만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소전제)를 생략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사학적 기술은 언제 어디서 쓰일까. 단순히 누군가와 다투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말빨’에 당하고 난 후, 집 침대에 누워 ‘그 때 이런 말을 할 걸’ 하며 억울함으로 이불킥을 하는 사람이 다음에 그런 유사한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일까. 실제로 이러한 나중에 따라오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던 후회가 내게도 많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좀 손해보며 지고 살자, 이다. 순간순간 말을 잘 해서 타인을 이기는 것이 상처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속감정이 그리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세 종류로 나눈다. 모두 연설이다. 누군가의 사소한 말다툼은 아니다.     


  수사학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청중의 유형이 세 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연설은 말하는 사람, 주제, 듣는 사람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되는데 수사학의 목적이 관여하는 것은 이 가운데 맨 나중 것, 즉 듣는 사람이기에 하는 말이다. (중략) 따라서 연설에는 필연적으로 심의용 연설, 법정 연설, 과시용 연설, 이 세 종류가 있다. 심의용 연설은 어떤 일을 하라고 권유하거나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개인적으로 권유하는 사람들도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언제나 권유하거나 아니면 만류하기 때문이다. 법정 연설은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변호한다. 소송 당사자는 반드시 고발하거나 변호해야 하니까. 과시용 연설은 누군가를 찬양하거나 비난한다.     


  심의용 연설은 대개 정치연설로 불리고 연설가는 미래를 심의한다. 법정연설은 당연이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과거를 심의한다. 그리고 과시용 연설은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이 철학자는 각 연설에 대해 상세하게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여기에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수사학』은 읽어내기에 그리 편한 책은 아니다. 잘못 접근하면 흥미도 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가, 검사, 변호사 등이 되고 싶거나 언변 자질이 필요한 사람은 꼭 읽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마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한비의 『한비자』처럼 조금은 야비하고 무서운 책일 수도 있다. 위정자들이 설득기술을 익히고 심리적으로 대중의 마음속으로 파고들면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청중의 감정과 성격의 역할을 알고 그들의 연령대를 알고 설득기법을 활용하면 청중들은 감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지고 말 테니깐.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옛날에는 몸으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언어로 자신을 지켜야 할 때가 많다. 민주주의는 상당한 경우, 언어전쟁이다. 그 전쟁에서 우리는 위대한 시민의식으로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끝으로 책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의 연령대 중 노년기의 특성 한 가지만 살펴보자. 노년기의 기질이나 성격 등을 알고 이를 이용하고자 마음먹은 정치가는 아마도 노인들이 사랑하는 과거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표를 가져갈 것이다. 알아야 당하지 않는다. 이건 누군가와 단순한 말빨 싸움에 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품고 있는, 나만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내밀한 감정이 사실은 누군가의 분석에 의해, 그리고 언변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는 것이다.     


  노인은 희망보다는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과거는 길지만 여생은 짧은데, 희망은 미래에 속하고 추억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인이 수다를 떠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인은 회상하는 것이 즐거워서 과거사를 끊임없이 늘어놓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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