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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ul 31. 2021

비극적인 드라마에 거부감이 들 때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남자의 부모는 결사반대다. 자기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남잔 왜 안 되냐고 묻는다. 부모는 그냥 걔만 아니면 다 된다고 한다. 남자는 로미오와 쥴리엣 버전이래도 그 여자를 버릴 수 없다고 한다. 남잔 그 여자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이어나가기 위해 부모와의 연을 끊고 집을 나간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다. 그 여자는 배다른 여동생이라는 걸.     


  어디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이 정도면 애절하다. 그러나 이제 이런 드라마는 막장축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그 수위를 넘어서는 드라마들이 도처에 흘러넘친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들. 시청자들의 가슴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드라마들. 이 모든 것들의 연출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다. 그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시절, 아니 그 호랑이의 호랑이의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그 아득한 옛날에 이미 관객들을 훅 빠져들게 하는 드라마의 메커니즘을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가 말한 플롯의 구성요소에는 급반전, 발견, 수난이라는 것이 있다. 급반전은 사태가 반대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고 발견은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발견이 급반전과 결합될 때 우리는 연민이나 공포를 느낀다. 사랑하는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이복동생임이 밝혀질 때, 시청자들은 ‘저런, 이제 어쩌면 좋아’, ‘말도 안 돼’, ‘저들이 너무 불쌍해’ 등의 말들을 내뱉으며 급반전과 발견이라는 장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곧 두 주인공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즉, 수난이란 죽음이나 고통과 같이 파괴적인 파국을 야기하는 행동을 일컫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중요한 것은 급반전, 발견, 수난이라는 3종 세트에는 반드시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롯에는 단순한 것도 있고 복합적인 것도 있다. 플롯이 모방하는 행동이 원래 그런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행동이 앞서 규정한 바와 같이 연속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주인공의 운명이 급반전이나 발견 없이 바뀔 때 나는 이를 단순한 행동이라고 부르고, 주인공의 운명이 급반전이나 발견 또는 이 둘을 다 수반하여 바뀔 때 이를 복합적인 행동이라고 부른다. 급반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자체에서 생겨나야만 하므로 선행 사건과는 필연적이거나 개연성 있는 결과라야 한다. 한 사간이 다른 사건 때문에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림출처: YES24]

  시학((poietike, 포이에티케)는 얼핏 그 이름만 들어보면 시를 잘 쓰기 위한 작시론처럼 들린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그런 시를 잘 쓸 목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학』은 TV 드라마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이 읽으면 요긴하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이 책은 주로 비극을 이야기하고 희극이나 서사시를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이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좋은 작품 만들어보겠다는 열의로 『시학』을 읽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미 그들의 몸 속에는 이 책에서 말하는 중요한 논점들이 세포처럼 다닥다닥 형성되어 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비극을 구성하는 체계적인 방법에 대해 거의 처음으로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아마 그 다음 세대의 누군가에게 전수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또 그 다음 누군가에게로, 그러다보니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이해하고 극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방법을 익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나 의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주석을 달았을 뿐이다. 실제 원조를 찾아 떠나보고 싶다면 그를 만나 볼 수밖에 없겠다. 맛집을 찾아 수많은 프랜차이즈 지점이나 아류 식당들을 거쳐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원조 본점을 가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시학』을 읽어보면 그 맛을 제대로 알게 된다. 2300여년 전의 생각이 지금도 통용된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희비극이나 서사시는 모두 모방양식에 불과하다. 하긴 그렇다. 예술이나 문학은 인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일 테니. 근데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모방하는 건지, 우리가 예술을 모방하는 건지. 다시 말해 연출가는 드라마나 연극, 영화와 같은 자신의 작품 속에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녹여내거나 아니면 인간들이 예술작품 속 등장인물을 모방해 색다른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는 8차선 대로 중앙선에서 키스해봤던 경험을 드라마에 삽입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영화를 보고나서 소심하지만 동네 앞 2차선 도로 중앙선에서 애인과 키스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모방으로서의 예술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것은 모방으로 얻게 되는 인간의 즐거움 때문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 부정한다. 참된 것은 이데아일 뿐이다. 예를 들면 신은 침대의 이데아를 창조했으며 그 이데아를 본따 목수는 침대를 제작했고 그 침대를 보고 화가가 그림을 그렸으니 그것은 모방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그림이든 시든 모방으로서의 예술작품은 실재로부터 3단계나 떨어져 있으니 그리 바람직한 것은 못되는 것이다.     


  시는 대체로 인간이 타고난 두 원인에서 생겨난 것 같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모방을 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 하며,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사실은 경험이 입증한다. 아주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시신의 형상처럼 실물을 보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도 더 없이 정확히 그려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그럼 실제 삶에 있어서의 사람을 모방할 경우, 어떤 사람을 모방하는가. 여기서 희극과 비극의 차이가 나온다.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희극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연출된 극이고 비극은 매우 슬프고 비참한 일이나 사건이 연출된 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과 희극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단순명쾌하게 설명한다.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그의 구분은 참으로 타당하게 들린다.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히 웃고 즐거우면 희극이고 슬프고 울고 싶은 감정이 생기면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만, 모방 대상을 나누어 그 둘의 차이를 설명한 그의 의견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천재성이 느껴진다. 누구를 모방하는가에 따라 이미 희극일지 비극일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고자 하는 ‘비극’의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카타르시스(katharsis)’라는 용어를 소개했다. 카타르시스는 원래 의학용어에서 유래하였는데, ‘감정의 정화’나 ‘감정의 배설’을 뜻한다. 관객은 높은 수준의 인격을 가진 비극 주인공의 운명에 공감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 연민, 공포 등을 해소하고 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행복할 때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듣기 좋게 맛을 낸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종류별로 따로 삽입한다. 비극은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서술형식을 취하지 않는데,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듣기 좋게 맛을 낸’ 언어란 리듬과 선율을 가진 언어 또는 노래를 의미하고 ‘작품의 각 부분에 종류별로 따로 삽입한다’ 함은 어떤 부분은 운문으로만 진행하고 어떤 부분은 노래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비극을 구현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6가지 중요한 구성요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것들은 플롯, 성격, 사상, 조사, 노래, 볼거리를 말한다. 플롯은 사건의 짜임새를 말하는 데 그 중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플롯이 불가피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모든 드라마들에 있어서도 플롯의 중요성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성격이 중요한데 성격은 행동하는 인간의 본성을 판단하게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플롯이 그림의 밑그림이라면 성격은 그 밑그림을 채우는 색깔인 것이다. 성격은 대부분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말에 잘 드러난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상이다. 사상은 상황에 맞는 말과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된다. 성격이 등장인물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사상은 무엇을 증명하거나 논박하거나 보편적인 명제를 말할 때 그들의 발언 속에 들어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둘을 구별한다. 나머지 남은 셋 중에서 조사는 운율의 배열을 의미하고 볼거리는 등장인물의 의상이나 무대 장치를 말하며 노래는 비극을 더 비극답게 해주는 감초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훌륭한 비극이 되기 위해서 플롯을 구성할 때는 어떤 점을 특히 고려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3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못나고 부족한 등장인물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고, 뛰어난 자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이중의 결말이 되면 안 된다고 역자도 주에서 설명한다. 다음으로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주인공에게 닥치는 불행은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하마르티아 때문이어야 한다. 하마르티아(harmartia)는 단순한 판단착오나 실수, 과실 등으로 옮길 수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원래 나쁜 놈이거나 나쁜 놈이라는 성격적, 도덕적 결함을 지녔다기 보다는 원래는 괜찮은 사람인데 실수로 인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오이디푸스인데, 그는 하마르티아로 인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폐륜을 저지른다. 여기서 나온 말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신분은 적어도 미덕적인 면에 있어 중간 수준 이상이거나 아니면 훌륭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큰 명성을 누리는 자라야 한다. 못난 자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면 관객들의 반응은 뻔할 것이다. ‘싸다 싸’, ‘내 그리 될 줄 알았다’, ‘속이 시원하다’. 그렇다면 그건 희극이 되고 말 것이다.   

  

  훌륭한 플롯은 단일한 결말을 가져야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이중의 결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행 때문이어서는 안 되고 중대한 하마르티아 때문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우리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인물이거나 그보다 뛰어난 인물이어야지 그보다 못난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리 분량이 많지는 않다. 질적으로는 난이도가 조금은 있는 독서일 수 있겠지만 양적으로는 읽을 만 하다. 이 책은 그의 『수사학』과 같이 읽으면 서로 간에 더 이해하기 쉽다. 또한 『시학』을 읽고 나면 꼭 읽어보아야 할 작가들의 작품들도 많다.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 불리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의 희극작품 등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몇 번을 만나도 정이 가는 그런 인물들. 넷플릭스의 드라마나 영화도 봐야 하고 축구경기도 봐야 하고 늦잠도 자야 하고 직장생활도 해야 하고 카페에 가서 가끔 수다도 떨어야 하고, 아, 이러다가 언제 저런 작품들을 읽어볼까 마는, 인생은 생각하는 것 보다 사실 간결하다. 쓸데없는 잉여를 줄이는 것. 단촐해진다는 것은 덜 화려해진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더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런 것도 들어가 있지 않는 빵이 외려 감칠맛 나듯. 자,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볼까. Shall we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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