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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Jun 06. 2022

다른 사람들의 귀를 점령하고 싶을 때

-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 중 <잃어버린 편지들>

  내가 빵과 버터(bread and butter)를 위해 일하는 - 물론 처음에는 더 숭고한 목적이 있었지만 매일 출퇴근을 의무적으로 하다 보니 타성에 젖어든다 - 사회적 공간에는 한 여자분이 계시다. 그녀는 인기가 많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마치 ‘말하기 번호표’를 뽑은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그녀는 웅, 웅, 거리며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데, 어떨 땐 그녀의 웅, 웅, 하는 소리가 건성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정보 수용량이 임계점에 달해 있을 때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는 것은 상담사의 덕목 그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귀한 장점이다. 잘 들어준다는 것. 이것을 밀란 쿤데라 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의 귀를 점령해오는 사람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귀를 내어주는 행위’다. 즉 그녀는 자신의 귀에 대한 사용권을 항상 남에게 이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출처: YES24]

  작은 시골마을 카페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타미나가 그렇다.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녀가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건성으로 듣는지 진지하게 듣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타미나는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았다. 한 사람이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타미나는 묵묵히 들어준다. 그녀가 대화의 기술을 위반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대화의 기술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때로는 내 말을 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를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나랑 똑같네……, 나는 …….”이라는 문장은 맞장구를 치는 반응처럼, 상대방의 생각을 계속 이어가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그건 속임수다. 사실은 갑작스러운 폭력에 맞서는 갑작스러운 반항이며, 속박 상태로부터 우리 귀를 해방하고 상대방의 귀를 강제로 차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인간이 동료들 사이에서 보내는 전 생애는 타인의 귀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과 다름없다. 타미나가 누리는 인기의 비결은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는 자기 귀를 점령해 오는 사람들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런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정말 나랑 똑같네……, 나는 …….”     


  타미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 남편과 함께 불법으로 보헤미아 지방을 떠났기 때문이다. 보헤미아는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체코의 서쪽지역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도시로 프라하, 플젠, 체스키 크룸로프 등이 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프라하를 떠난 것은 1968년 이후다. 1968년은 체코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해다. 이른바 두프체크의 주도하에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일컫는 해로 우리는 이를 ‘프라하의 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해 8월 체코의 도전이 동유럽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우려한 소련군의 침공으로 인해 프라하의 봄은 짧게 끝나버렸다. 결국 민주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열망한 수많은 사람들이 체코를 떠나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나라 어느 작은 마을로 망명한 타미나도 자신에 대해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더군다나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제 그녀가 기억하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주위에 없다. 그녀는 말수를 잃어버렸고 그녀가 원하는 유일한 꿈은 고향땅에 두고 온 편지꾸러미와 일기를 적은 수첩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만이 그녀의 삶을 기억과 기억이라는 벽돌로 증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귀를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경우는 바로 주변의 사람들이 이 기억 속 물품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칠 때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프라하로 갈 계획이 있다는 말을 하면, 그녀의 입은 크게 개화하는 것이다. ‘언제 프라하에 갈 계획인가요?’ 심지어 프라하에 갈 거라는 입 냄새가 심한 위고라는 남자의 말을 듣고는 몸까지 열어주었다. 그럴 때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입은 닫혔고 다른 이의 입을 위해 귀를 봉사하는 것이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타미나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 대개의 사람들은 사연이 없단 말인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말하기 행위가 능동적이라면 듣는 행위는 수동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능동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앞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 중에 보람 있었거나 슬펐거나 화난 일을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들어줄 사람이 부재하는 경우다. 가족들조차도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방에 박혀 유튜브를 보거나 멀리 있는 사람들과 SNS를 하는 데 열을 올린다. 가족들조차 서로서로 귀를 틀어막아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익명의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밀란 쿤데라는, 그래서 사람들이 글을 쓴다고 한다. 고립과 공허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말을 들어줄지도 모를 불특정 다수에게 말문을 터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도 지금 그러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어쩌랴. 저마다 사람들은 글로써 자기의 언어를 높은 담처럼 쌓아올려 서로 간에 올바르게 소통하지 못하고 바깥의 어떤 목소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니 누구나 글을 쓰는 세상이 외려 고립을 심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글쓰기 광증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들어보자. 아마 1)번은 파이어족이나 좌식계급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 같고 2)번은 히키코모리족의 경우가 그 예가 될 것 같고 3)번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글쓰기 광증(책을 쓰려는 광박증)은 사회 발전이 세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할 때 전염병의 차원이 된다.
  1)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사람들이 무익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
  2) 사회 생활이 많이 세분화되어 전반적으로 개인의 고립화가 깊어졌을 것,
  3) 국가의 내적 삶에 큰 변화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을 것.     


  그리고 작가는 예언한다.     


  그래서 누구라도 거리로 나가 “우리는 모두 작가다.”라고 외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제 말이 들리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은 채 무심한 세계 속으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누구라도 고통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로 변화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는 (곧 닥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작가로 깨어날 것이며 전 세계적인 난청과 몰이해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놀랍게도 밀란 쿤데라의 말을 우리는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현대인은 작가 행세를 하며 산다. 브런치, 블로그, 인스타그램, 트위터, 혹은 SNS 메신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데 혈안이 되어가고 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거늘, 작가들은 좋아요, 개수를 보고 누군가가 내 말을 경청하고 있구나, 자위하며 그 다음 업로드할 글을 위해 다시 글 감옥으로 향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진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타미나는 어디든 존재한다. 그리고 타미나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도 또 다른 타미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설령 “정말 나랑 똑같네……, 나는 …….”이라고 말해도 괜찮다. 그것이 우리 귀를 해방하고 상대방의 귀를 차지하려는 시도일지라도, 그러면서 어찌어찌 하다보면 우리는 왜 귀가 두 개고 입이 하나인지 알게 될 것이고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 타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업로드 하면 구독자님들의 귀는 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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