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te Fall Nov 07. 2021

늘 다이어트에 실패할 때

- 법구의 『법구경』 -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게 맞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참을 수 있으면 이미 그(녀)는 반은 부처일 테니 말이다. 평범한 사람은 웬만해서는 부처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늘 실패해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라는 속성이 원래 그렇다.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먼 선사시대에 넓은 초원을 누비며 야생동식물을 섭취했던 인간의 식습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냉장고에 가득가득 음식을 채워 넣도록 하는 DNA를 전해주었다고 말하는 유발 하라리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탐욕적이다. 집착이라는 말의 유의어는 인간적이라는 말일 수 있으니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고 야식을 시켜먹는 스스로의 행위에도 자책하거나 분노하진 말자. 그저 인간일 뿐이다. 굳건히 참아낼 수 있으면 부처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서는 인간일 게고, 항상 무너진다면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더 평범하게 살지 덜 평범하게 살지는 그저 개인 선택의 영역이다.  

   

  『법구경』은 부처가 열반에 든지 300년 후쯤에 시구 형식으로 된 부처님의 말씀을 채록하여 기원 전후 경에 인도의 법구가 편찬한 책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채록은 여기저기 각 지방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말씀, 설화, 민요 등을 글로 기록하여 남기는 과정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을 남기지 아니하였듯이, 부처도 직접 글을 쓴 적이 없었으니 채록이 맞다. 원본은 팔리어본이다. 팔리어는 소승불교 경전에 쓰여진 종교어로 인도 북부에서 사용된 중세 인도아리아어라고 한다. 팔리어본 『법구경』의 원제목은 담마파다(Dhamma-pada)이다. 담마는 법 혹은 진리, 파다는 구 또는 말씀이라는 뜻이니 담마파다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의미가 된다. 팔리어본은 26품 423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423송은 423편의 게송을 말한다. 게송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공덕을 읊어 놓은 짧은 구절로 일종의 시와 같은 것으로 그냥 게(偈)라고도 한다. 정리하면 『법구경』은 초기 소승불교의 교단에서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채록하여 각 주제별로 적절하게 분류하여 편집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할지니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면 살아계셨던 부처님의 시대와 가까웠던  『법구경』은 필독서이다.     

[그림출처: YES24]

  사실 불교에 대해서는 남들 아는 만큼의 지식 밖에 없다. 거칠고 단순하게 말하면 불교는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움으로서 근심을 지워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걱정거리의 근원은 집착이 된다. 집착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항상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지름길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건가. 집착하지 않으려면 인간 세계의 욕구를 버려야 한다. 욕구를 버려야 한다니. 매슬로우(Maslow)가 자다가 벌떡 일어날 일이다. 당장 생리적 욕구는 어쩔 것인가.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법구경』 같은 불교경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집착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면 덜 집착하는 방법이라도 배워야 사는 게 덜 힘들다. 영원히 끊어버리지 못하겠으면 지혜롭게 공생하는 법을 배울 필요도 있다는 말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지 않고, 허리가 아플 때까지 자지 않고, 매 시간마다 연인의 위치파악을 하지 않는 것은 덜 집착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배부르게 먹어 후회하고, 늘어지게 늦잠을 자서 후회하고, 시시콜콜 연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체크해서 후회한다면, 그리고 이런 것들을 무한 반복한다면 충분히 인간적이기는 하겠지만 왠지 조금은 서글프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는 게 맞지만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에게 왕짜증이 일면 음식에 덜 집착하는 법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인생의 글귀를 만날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단 한 문장만 읽어도 그 책이 너무 좋아질 때도 있다. 『법구경』에서 내게 와 닿은 최고의 문장은 호희품 2장이다. 역시 집착에 대한 문장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가지지 않는 삶은 어떨까. 사랑하되 무덤덤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아니하되 무덤덤할 수 있다면 그런 인생 재미없을까, 아님 평안할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걱정이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또한 걱정이기에.

(호희품 2장)   


  부처님은 이 세상의 삶이 짧기에 집착해서 무엇하냐고 설파하지만, 짧고 허무한 삶이라서 인간은 외려 더 탐하는 것은 아닐까.     


육신은 멀지 않아 흙으로 돌아가서
형체가 사라지고 정신도 떠나간다
잠시 의지하여 머무는 이 몸에 무엇을 탓할까

(심의품 9장)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는 걸까. 그래서 아파트 위치와 크기, 자동차 크기와 원산지 같은 것들에 그리 목매는 걸까.     


내 자식이 있고 내 재산이 있다고
어리석은 사람은 분주하게 좇아 다니며 고뇌한다.
내 몸도 또한 내 것이 아니거늘
어찌 내 자식, 내 재산에 대한 집착으로 고뇌할 것인가.

(우암품 4장)     


  삶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면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밖에 없겠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카르페 디엠, 을 찬양했으니 그게 우리 식으로 노세 노세 젋어서 노세, 와는 결이 다를지라도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즐겁게 살라고 하는 것은 맞다. 확실한 것은 대강대강 욕망에 사로잡힌 날들로 삶을 채울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날들로 채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목전에서 등불을 찾고자 한다면 그 삶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      

어찌하여 즐거워하는가. 어찌하여 웃고 있는가.
생명은 언제나 소모되고 있거늘
깊고 그윽한 어두움에 가려진 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노모품 1장)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사람이 때로는 부럽다. 나에게는 아직도 너무 많은 불덩이가 가슴 속에서 이글거린다. 『법구경』 같은 책이 좋은 것은 소화기의 역할을 해줄 때도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소망한다는 것, 욕망한다는 것이 없다면 그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이제는 소망하지 아니하고 욕망하지 아니하고 집착하지 아니하는 삶도 배워 나가야 한다는데, 솔직히 머리가 아찔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삶은 이미 평안하여라
고요하여 번잡한 일 없으니
땔감을 더하여 불덩이가 치솟아도
어찌 나를 태울 수 있으랴.

(안녕품 5장)     


  이래서 집착은 마주(魔酒)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져도
떨어지자마자 다시 나무에 달라붙듯이
중생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옥에서 나와 다시 지옥으로 들어간다

(애욕품 9장)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말은 생각하는 나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 는 말이다. 얼마나 확신에 찬 말인가.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확실한 나라는 것은 없다고. 그러니 겸손하고 버리고 비워야 한다고. 합리주의자가 불교철학을 만나면 아주 당황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내세워야 하는 현대의 많은 주장들도 버려라 버려라, 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우아한 일인가. 버림은 얻음보다 그 울림이 너무 크다. 그저 옷 한 벌 버릴 때도 쾌감이 일지 않던가.     


나는 스스로를 확실한 나라고 여기지만


확실한 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하라.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없애야 하니
이렇게 다스리면 어진 사람 되리라.

(사문품 20장)

이전 08화 비극적인 드라마에 거부감이 들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