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블록

내게 주어진 시간 보따리

by 늦여름

일과 육아 둘 다 해내야 하면서(잘 해내야 한다가 아님) 나를 위한 시간도 필요했던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플래너부터 고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끝까지 쓰고 싶었고, 잘 쓰고 싶었고, 나랑 맞는 것을 고르고 싶었고,,, 그런데 사실 이렇게는 답이 안 나올 듯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전환시켜 가볍게 쓸 수 있으며 하루 동안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파악할 수 있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타입은 PDS라는 다이어리에 가까웠다.

시간대 별로 왼쪽엔 계획 오른쪽엔 실제로 한 일을 적는 그런 형태였는데, 이 방식이 지금은 나에게 필요하지만 계속 그럴지 알 수도 없고 두꺼운 다이어리를 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패스했다.


오프라인으로 교보에 구경도 가보고 싶었지만 집에서 멀고 짬도 안 나고, 근처 아트박스나 플라잉 타이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없었고, 찾으려고 마음먹으니 다 별로처럼 느껴졌다. 문구 인스타도 열~심히 들여다보았는데 예쁘고 감성적인 것 위주에다가 원하는 걸 찾으니 펀딩 제품이라 기다려야 하기도 해서 패스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알라딘 굿즈 중 본투리드 메모패드 중 데일리 플랜! 가격도 3600원! 한 장씩 떼서 원하는 날만 쓸 수도 있고, 정말 최적의 도구였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하루계획.png 출처: 알라딘 홈페이지

왼편에는 오늘 할 일을 자유로이 적고, 오른편의 모눈은 한 시간을 10분 단위로 쪼개 놓은 블록이라, 내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을 표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보는 것과 그 1시간을 6개로 조각내어 보는 것은 상당히 달랐다.

어떤 일이 40분이 걸렸다고 하면 1시간 기준에선 20분은 그냥 여차저차 사라지기도 하는 시간이지만, 10분 단위로 볼 때는 남은 20분은 무언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처럼 보인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시간을 조금은 내 손에 쥐고 컨트롤하게 된단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기록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냥 멍 때리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잠깐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 그 시간이 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시간들을 내가 통제한다면 10분, 20분을 모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록을 이렇게 하기 전에는 출근 시간 + 업무 시간 + 점심시간 + 업무 시간 + 퇴근 시간 + 육아 시간 이렇게 통으로 생각하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히고, 한 시도 쉴 틈이 없게 느껴졌었다.


이건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으나 나는 이 데일리 플랜을 적으며 내 개인 느낀 점, 짤막한 일기, 포부 등등을 자꾸 적는 나 자신을 발견하여, 취침 시간 이후 빈칸은 하루의 감상, 일기를 적는 용도로 썼다.


이 기록 방식은 생각보다 오래 유지하진 않았다 작년 9월~10월 집중적으로 했고, 그 뒤에는 일정이 조금 복잡한 날이나 조금 시간을 허투루 쓰는 느낌을 받을 때 가끔씩 쓰곤 했다.


그 이유는 평일에 내 일상은 사실 큰 틀에서는 동일하니 내가 보통 언제 출근하고 퇴근하는지 언제 취침하는지 점심시간은 언제인지 등등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내가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이제 머릿속에 잘 저장이 되었다.


막연히 1시간 반쯤 걸리나 생각했던 출근시간이 평균 1시간 10분~15분 정도라는 것, 내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시간은 10시라는 것, 그러나 잠은 보통 11시에 잔다는 것, 아침에 오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을 할 때 한 30분은 걸리나 싶었지만 실제로는 10분에 불과하다는 것.


이 방법이 누구에게나 맞다고 절대로 생각하진 않는다. 너무 효율충 같기도 하여 거부감이 들 수도 있고, 뭐 그렇게 나노단위로 쪼개서 사나 싶을 수도 있고, 그게 더 갑갑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나에게는 참 잘 맞는 방법이었고, 이 시간 블록 기록법으로 운동하고 공부할 시간을 마련했고, 결국 이렇게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더 긴 호흡의 글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 정신 건강이 좋아졌다.


정말 작고 부담스럽지 않게 시작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시간이 없어! 시간이 너무 없어!라고 느껴진다면 평일, 주말 나누어 내가 어떤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든 것을 적어보길 바란다.


내가 원하는 활동은 적게 하고, 원치 않는 활동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다.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마구잡이 기록! 보시죠!



IMG_3857.JPG 첫 기록

날짜를 적고, 오늘의 마음가짐을 하나 적어주었고, 주요할 일을 조금 적어주고 그 옆에 느낀 점을 파란색으로 적었다. 시간을 유용하게 쓰고 싶어서 퇴근하는 동안 뭘 하고 싶은지도 적었었다. 마지막 부분에 느낀 점은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서 소회를 적곤 했다.


처음에는 여기에 온갖 것을 다 적어보려고 했다. 하루 목표부터 시작해서, 하는 일, 느낀 점, 할 것, 못 한 것, 쇼핑 목록, 가계부... 그러나 이것도 결국 욕심이었다.


약간 생활 개조를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기록을 위한 기록이 되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는 정말 내가 쓰는 시간, 활동의 유형, 하루 소회 이런 정도로 간추려졌다.


업무 중에는 일을 하다 보면 내 의지와 달리 스케줄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다 적지는 못했지만,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시간과 확보하고 싶은 시간을 파악하려 애썼다.


의외로 시간 블록체크는 내가 하는 일을 그대로 적으면 돼서 어렵지 않았다. 그 보다 이 칸을 채우면서 내가 느끼는 점이 많았단 점이 새로웠고, 그걸 내 일상에 반영하고 싶어진 점이 놀라웠고, 자꾸자꾸 뭘 더 쓰고 싶어져서 신기했다.



IMG_3858.JPG 한 달 뒤 기록


기록은 처음부터 형광펜으로 구분하며 했고, 나중에는 카테고리화시켜서 그 카테고리에 해당하면 조금 다른 유형의 일이라도 같은 색으로 표시하여 하루 중 내가 얼마나 할애하는지 살펴봤다. 내가 잘했다고 느낀 부분엔 스마일 스티커도 붙이며 스스로 다독이며 했다.


그냥 한 장 뜯어서 적었기 때문에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고 펼쳐서 보기도 편했다. 그리고 망친다는 개념도 없었지만 망치면 새로 다시 꺼내 적으면 되었기 때문에 전혀 부담이 안 됐다.


다 제대로 체크하지 못하는 것 또한 너무 좌절스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기록을 꾸준히 못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시간을 잘 쓰고 싶어서 이걸 하는 건데, 예쁘게 못한단 이유로, 내 성에 안 찬단 이유로 기록을 위한 기록으로 집착이 시작되면서 중단되었던 것이다.


집착을 버리고 그냥 자유로이 적고 표시하고 하다 보니 진짜 내가 원하는 시간 조각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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