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공화국의 폭군, 트루히요 이야기
1961년 5월 30일 늦은 밤. 도미니카공화국 수도 산토 도밍고 외곽 지역에서 난데없이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고향 산 크리스토발로 돌아가던 트루히요 대통령의 차량을 두고 암살 작전이 펼쳐진 것이었습니다. 치열했던 총격전 끝에 암살 작전은 성공했고, 30년 넘게 이어져온 트루히요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도미니카공화국의 현대 역사를 바꾼 사건으로, 여전히 많은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미 이전 글에서 트루히요가 왜 카리브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되는지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 만행을 꼽자면, 권력에 저항하던 미라발 자매를 죽인 사건과, 베네수엘라 대통령 베탕쿠르트를 살해하려 한 혐의가 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 쿠바, 아이티, 심지어 미국인을 상대로까지 압력을 행사했던 트루히요였는데, 그가 집권한 기간 동안만 약 5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트루히요 독재에 불만이 있었지만, 워낙 권력의 힘이 막강하다 보니 그에게 제대로 저항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도 발 빠르게 참전했고, 중남미 사회주의 세력과 거리를 두며 미국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가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엔 대내외적으로 무서울 게 없었던 겁니다.
30년 넘게 지속된 트루히요 정권은 결국 1961년 5월 30일에 끝을 맺게 됩니다. 결정적으론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진 게 큰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당시 케네디 정권은 트루히요의 폭정이 도미니카 공화국 국민들의 불만을 키워 쿠바처럼 또 다른 혁명으로 번지게 만들까 우려했습니다. 미국 CIA는 은밀하게 반 트루히요 세력과 손잡고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긴박했던 암살 사건 정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세 명의 암살 요원은 트루히요가 지나갈 고속도로에 미리 매복하고 있었고, 네 명의 요원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트루히요가 탄 리무진을 조심스레 미행했습니다. 그들은 암살 작전 지점에 이르자 리무진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앞서 준비해있던 세 명의 요원들도 신호에 맞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트루히요와 운전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숫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암살 요원 모두를 제압하기엔 무리였습니다. 당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던 안토니오 임버트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트루히요는 왼쪽 어깨에 부상을 당했지만 차에서 빠져나와 걸음을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한 발 더 쐈다. 상황이 종료된 뒤엔 그의 시체를 차에 싣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트루히요의 죽음은 도미니카공화국 독재 시대의 끝을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일곱 명의 암살 요원 중 살아남은 임버트는 국민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물론 도미니카 공화국에 곧바로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적어도 트루히요처럼 끔찍한 독재를 다시는 겪지 않게 되며 민주주의 체제로 조금씩 방향을 틀게 됩니다.
2021년 5월. 도미니카 대통령 루이즈 아비나데르 (Luis Abinader)는 매년 5월 30일을 ‘자유의 날’ (Dia de la Libertad)로 명합니다. 독재 기간 동안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저항 정신을 보여준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도미니카공화국에선 여전히 5월 30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 동쪽 해변엔 5월 30일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고, 트루히요가 죽은 고속도로는 이름 자체가 아예 5월 30일 고속도로로 바뀌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 역사에서 5월 30일은 잊지 못할 날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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