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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n 16. 2022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떨어진 100개가 넘는 폭탄들

아르헨티나 공군이 아르헨티나의 중심을 무참히 폭격한 아이러니한 이야기  


유럽이나 아시아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중남미 국가들끼리 벌어진 전쟁은 많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선 당장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1,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고, 아시아에서도 국가와 국가들 사이의 세력 다툼을 위한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중남미에선 태평양 전쟁, 차코 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남미를 괴롭힌 건 오히려 국내 정치 갈등으로 인한 내전이었습니다. 통계만 봐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테러나 내부 분쟁으로 사망한 수가 훨씬 많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아르헨티나의 ‘5월의 광장 학살’ (La Masacre de Plaza de Mayo)도 중남미에서 벌어진 끔찍한 내전에 속합니다. 1956년 6월 16일 아침, 아르헨티나 공군은 아르헨티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5월의 광장 주변을 포함한 대통령궁에 폭격을 가합니다. 이 공격은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 규모의 공중 폭격으로 기록됐는데, 적군도 아닌 아르헨티나 공군이 직접 공격한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공중 폭격으로 300명이 넘는 무고한 자국민을 희생시켰던 걸까요?


폭격 당싱의 모습 (사진 자료: infobae)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게 있다면, 아마 무분별한 복지와 포퓰리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2000년대 초 베네수엘라 차베스가 포퓰리즘으로 유명했다면, 1940년대 중남미 포퓰리즘의 아이콘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뤄지며 노동자 계급이 증가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이탈리아 이민자의 날’ 글에서 언급해 드렸듯이, 유럽 이민자와 아르헨티나 교외 지역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며 노동 계급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을 대표해 줄 마땅한 정치 세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1943년 새롭게 권력을 잡은 후안 페론은 이 점을 정확히 파악했고, 노동자들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복지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 CGT를 만드는 등 노동자 중심 정책을 펼쳤고, 그의 옆에는 에바 페론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페론의 '서민을 위한 정치'를 도왔습니다. 다양한 복지 제도를 시행한 결과, 아르헨티나에서 후안 페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정치권에서는 아예 ‘페론이즘', 혹은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 이념이 만들어졌고,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노동자와 서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던 후안 페론도 경제 위기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발목을 잡은 건 복지 제도로 인한 지나친 공공 부문 적자와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기존 정치 세력 엘리트들은 페론을 포퓰리즘이라 비판했고, 군대와 손잡고 그를 몰아내기 위한 연합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페론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급진당 (UCR), 사회당, 보수당은 반 페론 연대를 형성했고, 그를 제거한 뒤 삼두 정치를 수립하는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남아있는 총탄의 흔적 (사진 자료: 위키피디아)


6월 16일 아침. 후안 페론을 제거하기 위해 시작된 공습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트램을 타고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폭격으로 전원 사망했고, 여기엔 어린아이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날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부의 하늘을 가로질렀던 전투기들은 총 100개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고 합니다. 당시 공격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폭격을 당한 건물들에서는 아직까지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한편 이 날 공습을 당한 후안 페론 대통령은 어떻게 됐을까요? 첩보를 통해 공격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페론은 급히 벙커로 피신했고, 기습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반대 연합이 일으킨 쿠데타는 실패했고, 오히려 페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페론 반대 세력은 그를 몰아내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같은 해 9월 한 번 더 쿠데타를 일으켜 페론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1955년 6월 16일에 벌어진 비극 이후 아르헨티나에선 총, 폭탄 같은 무기를 사용한 테러가 나비 효과처럼 번졌습니다. 페론이 물러난 뒤에도 페론 지지자들과 그 반대 세력 간 대치 상황은 계속됐는데, 그때마다 폭탄 테러나 암살 작전을 활용해 서로를 공격했던 겁니다. 이 같은 폭력 사태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시민들이었습니다. 양쪽 대립이 끝나지 않으면서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만 늘어난 것입니다. 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1976년 비델라의 군부 정권이 자리잡기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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