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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n 26. 2022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의 최후는 어땠을까?


세계사를 바꾼 스페인 정복자를 꼽으라면,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 이렇게 두 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르테스는 멕시코의 아스텍 제국을, 피사로는 안데스에서 번성했던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며 신대륙에서의 식민지 개척을 본격화한 정복자들입니다. 오늘은 신대륙 정복 초기 최고의 권력자로 떠올랐었던 피사로의 마지막 생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뒤 피사로의 삶을 상상해보면, 스페인에게 부를 가져다준 공로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피사로에게 잉카 제국을 정복한 대가로 많은 금전적 이익과 후작이라는 높은 지위를 선사했습니다. 그런데,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프란시스코의 삶은 그리 평화롭지 못했던걸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질투했던 다른 정복자들과의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계속된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디에고 알마그로 (사진 자료: thoughtco)


피사로를 가장 많이 괴롭힌 건 바로 라이벌 디에고 데 알마그로 (Diego de Almagro)였습니다. 알마그로는 현재 에콰도르 수도인 키토를 세웠고, 스페인 정복자 중에선 최초로 칠레 북부 지역을 개척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피사로 만큼 많은 공을 세웠던 알마그로였지만, 정작 모든 업적은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피사로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피사로에게 조금씩 불만을 품기 시작했는데요. 피사로는 이를 눈치채고 알마그로에게 땅을 제공해주기로 약속했지만, 그것마저 지키지 못하며 오히려 둘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두 정복자의 갈등을 진정 시키고자 페루 북쪽은 피사로, 남쪽은 알마그로가 다스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를 두고 서로 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일명 라스 살리나스 전투 (Batalla de Las Salinas)라 불리는 운명의 전투에서 피사로의 군대가 가까스로 승리를 차지하게 됐는데요. 포로로 붙잡힌 알마그로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처형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사진 자료: 위키피디아)


영원한 라이벌을 제거한 피사로는 이제 페루에서 권력 일인자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알마그로의 아들과 그의 부하들이 피사로에게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충성을 바쳤던 알마그로를 잃었다는 사실, 그리고 목숨 걸고 신대륙을 개척 했음에도 아무 이득도 보지 못한 사실을 모두 이기적인 피사로 탓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1541년 6월 26일 오후, 스무 명이 넘는 암살자들은 방심하고 있던 피사로를 기습 공격했고, 위대한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는 잉카가 아닌 같은 스페인 사람들의 칼날에 최후를 맞게 됩니다. 


피사로의 죽음 이후, 알마그로의 아들 엘 모조 (El Mozo)는 페루 총독의 빈자리는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신대륙에서 일어나던 권력 다툼을 좋게 보지 않던 스페인 당국이 이를 가만히 둘리 없었습니다. 피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은 카를로스 1세는 엘 모조 대신 완전히 새로운 인물인 바카 데 카스트로에게 페루 총독 자리를 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군대를 파견해 알마그로 일당을 처리할 것을 명령했는데요. 스페인 당국과 엘 모조 사이에 벌어진 추파스 전투 (Batalla de Chupas)에서 엘 모조 세력은 크게 패했고, 이후 열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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