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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l 20. 2022

콜롬비아 독립은 ‘꽃병'이 깨지며 시작됐다?


매년 7월 20일은 콜롬비아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1810년 7월 20일 보고타에서 일어난 이른바 ‘꽃병 사건'이 콜롬비아 독립 과정의 계기가 됐는데요. 오늘은 콜롬비아 독립이 시작됐던 당시의 상황을 간단히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콜롬비아 독립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콜롬비아를 다스렸던 스페인의 상황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초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며 자연스레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영향력도 약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자 크리오요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 혈통)들은 식민지 내에서 정치적 권리와 자치권을 요구했고, 스페인의 불공정한 권력 남용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당국은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양측 간 갈등이 커지며 끊임없는 마찰을 빚게 됩니다.


1810 7 10일은 콜롬비아 사람들의 참아왔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던 순간이었습니다. 크리오요 출신 루이스 루비오는 보고타 시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스페인 출신 호세 요렌테를 찾아가 꽃병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훗날 콜롬비아 독립을 이끌게 ) 안토니오 비야비센시오가 보고타에 방문했으니, 저녁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병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요렌테는 거만한 태도로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나는 크리오요나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꽃병을   없다.”라고 말하며, 비꼬는 톤으로 루이스 루비오를 내쫓은 겁니다.


루비오 vs. 요렌테 (사진 자료: 위키피디아)


화가 난 루이스 루비오는 그 자리에서 꽃병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거리로 나와 “스페인 출신 요렌테가 우릴 무시했다!"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스페인에 화가 잔뜩 나있던 사람들을 이때다 싶어 거리로 뛰쳐나와 ‘스페인 타도’를 외쳤고, 같은 날 저녁 크리오요들이 모여 콜롬비아 독립 선언서 (Acta de Independencia)까지 서명하게 됩니다. 꽃병 소동이 일어난 불과 하루도 안돼서 콜롬비아 독립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요렌테의 꽃병’, ‘꽃병 사건' 이야기 하나만 듣고 보면 꽃병 하나 때문에 모든 게 즉흥적으로, 나비 효과처럼 번진 거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크리오요들은 이미 꽃장수 요렌테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요청을 거절하는 순간 시위를 시작하기로 계획까지 세워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꽃병은 독립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신호탄이자, 크리오요들의 큰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한 일부였던 겁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요렌테의 꽃병' (사진 자료: http://www.museoindependencia.gov.co)


황금 박물관, 보테로 박물관이 모여있는 보고타 시내에는 7 10 당시의 기록을 담은 독립 박물관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의  다른 이름은 '꽃병의 ' (Casa de Florero)으로, 위에서 말씀드린 역사 이야기를 반영한    있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1882 예술가 에피파니오 가라이(Epifanio Garay) 기증한 실제 꽃병이 전시되어 있으며, 콜롬비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들려야  상징적인 장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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