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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Jul 22. 2022

멕시코, 1968

멕시코에게 1968의 의미는 무엇일까?


1968년은 멕시코 역사에서 중요한 한 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처음 개최되는 올림픽이 열렸고, 경제는 9.4%나 되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멕시코가 가진 미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고, 덩달아 멕시코 역사나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1968년의 기억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멕시코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68년 학생 운동'이 바로 이때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전 글에서 멕시코의 1994년은 모순된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중요한 해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NAFTA가 체결되며 밝은 미래를 꿈꿨지만, 농민들의 사파티스타 운동이 벌어지며 어두운 측면을 낱낱이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멕시코에게 1968년은 1994년과 비슷한 해로 볼 수 있습니다. 높은 경제 성장과 올림픽이 있었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했던 학생 운동이 함께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멕시코 학생 운동은 1968년 7월 22일에 시작됐습니다. 이 날 국립과학기술대 학생들과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UNAM)에 속한 오초테레나 고등학교 사이에 미식축구 경기가 있었고, 경기 도중 신경전과 함께 사소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싸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결국 경찰까지 동원돼 모든 상황이 종료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찰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코앞으로 다가온 올림픽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폭동을 멈춘다는 목적으로 과잉 진압을 했고, 몇몇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부상까지 당하며 오히려 화를 키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7월 26일 수 천명의 학생들은 멕시코의 심장 소칼로 광장에 모여 집회를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 2일까지 수 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로 확대됐습니다.


소칼로 광장에서 벌어진 학생 운동 (사진 자료: 위키피디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소한 싸움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번질 수 있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싸움은 단순한 촉매제였을 뿐, 당시 멕시코 학생들의 사회적 불만은 이미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습니다. 운동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경찰의 부당한 폭력 행사뿐만 아니라 권위적 정치 시스템에도 도전장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1929년 이후 40년 가까이 집권한 제도혁명당 (PRI) 정권이 독재 세력이라 생각했고, 권력에 취해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내길 바랬습니다. 이런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잠잠했던 변화에 대한 욕구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습니다. 학생들이 멕시코 대중들의 눈을 뜨도록 돕자, 더 나은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열망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한편 멕시코의 학생 시위는 세계적으로 일어난 '68 운동'과도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시작된 청년들의 운동은 많은 공감을 얻었고, 곧바로 독일, 스페인, 미국, 일본까지 확대됐습니다. 그들은 부패한 사회 시스템을 변화 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했으며, 부당한 인종차별, 성차별 같은 각종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찾길 원했습니다. 멕시코도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68 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불던 학생들의 저항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행진하는 멕시코 학생들의 모습 (사진 자료: radiodiaries)


결과적으로 보면, 1968 멕시코 학생 운동의 결말은 좋지 않았습니다. 멕시코 학생들은 광장에서 "우리는 올림픽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혁명을 원한다!" 외쳤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기보다 국가 이미지를 생각해 그들을 진압하기에 바빴습니다. 특히 1968 10 2일은  300명의 시민과 학생이 목숨을 잃은 '틀라텔롤코 학살' (Tlatelolco massacre) 일어난 걸로 유명합니다. 이렇게 제도혁명당은 잔혹한 방법을 쓰면서 까지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2000년까지 권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비록 1968 학생 운동은 궁극적으로 원했던 목표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처음으로 학생들이 직접 나서 변화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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