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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Aug 10. 2022

결코 쉽지 않았던 에콰도르의 독립 이야기

8월 10일 에콰도르 독립 기념일 


얼마 전 볼리비아 독립 기념일에 이어, 오늘은 에콰도르 독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에콰도르에서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때는 1809년 8월 10일이었는데요. 이른바 ‘첫 번째 독립 외침’ (Primer Grito de Independencia)이라 불리며, 에콰도르 독립 운동에 대한 시작을 알린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에콰도르의 독립 운동은 지금의 수도 키토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이전부터 키토는 에스탄코스 혁명, 알카발라스 혁명이 일어나며 유달리 스페인 지배에 대한 저항이 거센 곳이기도 했습니다. 과야킬이나 쿠엔카 같은 다른 주요 도시가 있지만, 유달리 키토에서 반란이 잦았던 이유는 이곳이 스페인 정치/행정의 중심지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에콰도르는 페루 부왕령에 속해 있어 리마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일종의 고등법원이라 할 수 있는 왕림 심문원 (Real Audiencia)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16세기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왕립 심문원은 총 5개 (과달라하라, 콘셉시온, 차르카스, 보고타, 키토) 였는데, 키토가 그중 하나로 부왕령 수도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1809년 8월 10일, 스페인 본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키토 크리오요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임시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후안 피오 몬투파르 (Juan Pío Montúfar)를 초대 키토 대통령으로 임명했고, 군대를 조직해 주요 공공 기관을 장악하며 혁명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또 이들은 이바라, 리오밤바, 암바토 같은 가까운 다른 도시에서도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조금씩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먼저 다른 주요 도시였던 과야킬이 키토의 임시 정부 선언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리마와 보고타에서 출발한 스페인 군대가 키토를 포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에콰도르의 독립은 이전에 설명해드렸던 콜롬비아나 볼리비아 독립 과정과 굉장히 비슷한 운명을 맞이 했습니다. 크리오요들이 세운 훈타 (Junta) 임시 정부는 스페인의 거센 공격에 잠잠해졌고, 1820년에 이르러서야 볼리바르가 이끄는 독립군에 의해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에콰도르의 독립은 공식적으로 1820년 10월 9일에 이뤄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슈는 각 지역이 자치성을 지닌 독립국이 될 것이냐, 아니면 하나의 국가로 속할 것이었습니다. 이전 볼리비아 독립 편에서 볼리비아는 페루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나라가 되는 걸 선택했습니다. 에콰도르는 나름대로 경제와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했던 키토와 과야킬이 독립국을 희망하며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었는데요. 1822년 두 도시 모두 그란 콜롬비아 (Gran Colombia)에 속하기로 공식 선언하면서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그란 콜롬비아의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며 분리됩니다.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시작으로 에콰도르도 1830년 그란 콜롬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택했고, 같은 해  최초의 에콰도르 헌법이 만들어집니다. 이 헌법은 아주아이, 과야킬, 키토 주가 결합하여 에콰도르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음을 선언했고, 후안 호세 플로레스(Juan José Flores)와 호세 호아킨 데 올메도(José Joaquín de Olmedo)가 각각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집권하게 되며 에콰도르 독립 과정은 끝을 맺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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