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을 기준으로 아이티 상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2021년 대통령이 암살 당한 뒤 치안은 극도로 나빠졌고, 갱단들이 나서 서로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이미 기본적인 인프라나 공공 서비스는 없어진 지 오래고,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빈곤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아이티가 처음부터 가난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이티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했고, 유럽에게 억압받던 다른 중남미 국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시작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3세기 넘게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이티는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독립을 꿈꿨고, ‘아이티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투생 루베르튀르의 리더십 아래 결국 최초의 독립국으로 탄생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1791년 8월 22일은 아이티에서 싸움이 처음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던 날 밤, 플랜테이션이 집중된 북쪽 지역에서 흑인 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출신 플랜테이션 주인들을 살해했고 농장 건물에 불을 지르며 반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몇 주도 안돼서 반란에 동참한 흑인 노예는 십만 명으로 불어났고, 180여 개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커피 농장 900개를 완전히 불태웠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반란을 주도했던 노예들은 나라 전체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없었던 걸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본토에서 곧 군사를 보낼 경우 싸움이 될 수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고, 사회 시스템 전체를 바꾸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동료나 가족들에게 자유를 달라는 조건을 프랑스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라기보다, 계몽사상에 기반해 프랑스 노예가 아닌 시민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한편 프랑스 vs. 흑인 노예 대결로 시작된 아이티 상황은 영국과 스페인이 참여하며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프랑스령이었던 아이티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영국과 스페인이 간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프랑스가 아이티를 버리고 도망갈 경우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심지어 아이티 반란군에게 무기와 돈을 지원해 프랑스를 내쫓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를 눈치챈 프랑스 당국은 1793년 노예 제도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합의문에 동의했고, 대신 흑인 노예들에게 ‘프랑스 시민'으로써 영국, 스페인군과 싸워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독립 리더 투생 루베르튀르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 vs. 흑인 대결 구도는 프랑스+흑인 vs. 영국+스페인으로 바뀌었고, 자유를 얻은 아이티 흑인들은 프랑스 당국과 연합해 외세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1802년, 상황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노예 제도를 없애겠다는 약속을 무효화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흑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엄청난 경제적 수익을 가져다줬던 플랜테이션 농장을 다시 세우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자유를 얻은 흑인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프랑스 vs. 흑인 구도의 갈등이 다시 한번 터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투생 루베르튀르가 붙잡혀 감옥에 보내지기도 했지만, 뒤를 이은 장 자크 드살린이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압도적으로 평가됐던 프랑스 군대는 아이티 황열병에 고전하며 결국 1804년 물러났고, 아이티 공화국이 세워지며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독립운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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