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제는 볼리비아의 36번째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37년 35살에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헤르만 부시 (German Busch)는 볼리비아-파라과이 차코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 출신이기도 했는데요. 볼리비아 역사에서 다소 독특한 행보를 보였던 부시 대통령과 당시 볼리비아 상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전 글에서 다뤘던 것과 마찬가지로, 볼리비아는 차코 전쟁에서 별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국고만 낭비하게 됐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쟁에서 공을 세웠던 장군들이 정치권력을 차지하게 됐는데요. 헤르만 부시도 이 중 한 명으로, 1937년에는 토로 장군에 이어 군인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부시가 주목을 끈 건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주요 국가 정책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보통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보수적 성향이 강하며, 사회의 질서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부시는 군사 사회주의 (Military Socialism)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반엘리트주의와 원주민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38년 발의된 새 헌법은 사회 보장법, 노동법 개혁을 비롯해 원주민들의 공동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여 볼리비아 사회를 바꾼 제도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시는 군인이었음에도 개혁 정책을 펼치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볼리비아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정치적 경험이 전무했었기 때문에, 여러 군소 정당들과 협상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의 지원자가 되어주어야 할 여러 좌파 정당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며 점점 권위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나갔습니다. 또 당시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유대인 탈출이 한창이던 시기였습니다. 볼리비아는 제한 없이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드문 국가 중 하나였는데 이를 두고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했고, 친 독일계 관료들이 '반유대인주의'를 외치며 그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1939년이 되며 언론의 공격은 한 층 더 수위가 세졌습니다. 그들은 부시 대통령을 '무능력하고 독재적이다'라고 비유했으며, 기존 엘리트 계층도 그를 맹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2년 만에 그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졌으며, 개혁 정책을 실시할 동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같은 해 8월 23일 새벽 자신의 집에서 총으로 자살하며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시의 측근들은 그가 차코 전쟁 이후 PTSD로 힘들어했으며, 그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봤습니다.
볼리비아에서 처음 실시된 개혁 프로젝트는 그의 죽음과 함께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볼리비아 사회 내에 변화를 기대할만한 조금의 씨앗을 뿌린 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볼리비아 사회 복지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었는데, 부시 대통령을 기점으로 이에 대한 요구가 조금씩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는 1952년 볼리비아 혁명으로 이어졌고, 볼리비아는 역사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