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티너리 Sep 08. 2022

과테말라,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다


오늘은 과테말라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외교 분쟁을 다루고자 합니다. 1981년 9월 8일. 과테말라는 영국과의 외교 단절이라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리며 양국 간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다뤘던 ‘앵글로-과테말라 조약’은 과테말라와 영국이 벨리즈를 다스릴 수 있다는 주권을 보장받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하지만 1980년대 벨리즈가 독립국이 되려 하자, 과테말라와 영국은 벨리즈 독립 정당성을 두고 다시 한번 다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우선 벨리즈의 독립 기념일은 1981년 9월 21일입니다. 영국령 온두라스 (British Honduras)라는 이름을 가지고 영국의 통치를 받은 역사를 끝냈는데요. 하지만 과테말라는 이웃 국가 벨리즈의 독립이 무효라고 발표했습니다. 영국이 자신들과 벨리즈 사이에 남아 있는 분쟁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독립을 시키려 한다는 주장이었던 겁니다. 심지어 몇몇 과테말라 사람들은 1821년 독립부터 벨리즈는 과테말라의 일부였으며, 영국이 강제로 자신들의 땅을 만들었기에 자신들이 벨리즈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가 영국과 외교를 단절하기로 한 결정은 이런 과테말라의 강경한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과테말라 대통령이었던 로미오 루카스는 정부가 “영국이 벨리즈에 부여한 일방적인 독립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고, 벨리즈 독립은 "유엔 헌장 제33조에 따라 국제적으로 합법화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과테말라는 “런던과 벨리즈에 있는 과테말라 영사관의 폐쇄, 과테말라에 있는 영국 영사관의 폐쇄를 고려하는 것 외에도 양국 간 상업 관계의 단절과 폐쇄를 고려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벨리즈-과테말라-영국의 갈등은 물리적 충돌이 우려될 만큼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평화적인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있었는데요. 1981 3. 벨리즈 측은 독립국으로 승인받기 위해 과테말라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고, 양국은 합의점을 찾기 위해 여러  회담을 가졌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벨리즈 측에서는 “벨리즈 정부가 과테말라에 너무 많은걸 양보한다라고 불만을 가졌고, 과테말라 측에선 “벨리즈 자체가 독립을 이루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팽팽한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벨리즈는 독립을 이뤘지만, 모든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국군은 독립 이후에도 1994년까지 벨리즈에 머무르며 과테말라 군의 혹시 모를 침략에 대비했고, 과테말라도 꾸준히 국제사법재판소에 벨리즈 문제에 대해 법적인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복잡한 식민 지배 역사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과테말라-벨리즈 갈등은 중미의 대표적인 영토 분쟁 문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진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