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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Sep 09. 2022

칠레는 어떻게 이스터섬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남태평양 한가운데에는 조그만 한 섬이 하나 있습니다. 영어로는 이스터 섬, 스페인어로는 이슬라 데 파스쿠아라 불리는 이곳은 거대한 모아이 석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1888년 9월 9일. 칠레는 이 섬을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로 합병했는데요. 오늘은 이스터 섬이 어떻게 칠레의 일부가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리적으로 살펴봤을 때, 칠레와 이스터섬의 거리는 약 3,70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비행기로도 약 5시간 30분이나 가야 할 만큼 먼 거리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가 이스터섬을 차지한 건 칠레의 영토 확장 정책과 더불어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미국이 하와이를 비롯한 다수의 태평양 섬을 자신들의 영토로 귀속시킨 것처럼, 칠레도 남태평양 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통해 활동 반경을 넓히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칠레가 본격적으로 이스터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1870년부터였습니다. 칠레 정부는 오히긴스 (O'Higgins) 호를 파견해 섬 지리를 파악하고 주민들을 만나 보도록 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섬 안의 인구는 100명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하는데요. 칠레 내에서는 이스터 섬 합병 문제를 두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섬을 굳이 비용을 들여가면서 까지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발마세다 대통령은 폴리카르포 토로 해군 장군에게 반드시 이스터섬을 차지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칠레의 이스터섬 합병 과정을 연구한 로드리게스 카네스타에 따르면, 당시 국제적 상황이 칠레가 섬을 차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 미국은 남북 전쟁이 끝나고 국내 문제에 초점을 맞추던 시기였고, 독일도 아직까지 제국주의를 실현시킬 때가 아니었습니다. 칠레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페루도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패하면서 이스터섬을 넘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사실상 가장 큰 장애물은 영국과 프랑스였고, 폴리카르포 토로 장군은 이스터 섬 합병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두 나라와 협상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타히티 섬을 포함한 여러 폴리네시아 섬을 점령하면서 남태평양 지역에서의 세력을 확장 중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스터섬에도 소수의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토로 장군은 타히티로 넘어가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고, ‘10년 동안 일정한 보상 금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스터 섬을 칠레가 차지한다는 내용에 합의하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프랑스의 영원한 라이벌 영국도 '자신들이 차지하지 못한다면 프랑스일 바엔 칠레가 이스터섬을 차지하는 게 낫다'라고 판단하여 칠레의 합병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유럽 열강과의 협상을 마친 칠레 정부의 마지막 할 일은 원주민들과의 협상이었습니다. 라파누이 (이스터 섬을 부르는 원주민 단어)의 부족장 아타무 테케나 (Atamu Tekena)는 칠레-라파누이의 ‘우정’과 서로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번역된 내용의 문서에 서명했는데요. 사실 이 증서는 칠레가 섬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들어가면서 사실상 칠레에 통치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미묘한 논란거리가 남긴 했지만 1888년 이스터섬은 칠레 영토로 귀속되었고, 현재는 칠레 발파라이소의 한 주로 속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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