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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Sep 11. 2022

'9월 11일'이 칠레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날인 이유


9월 11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은 아무래도 미국 뉴욕에서 벌어졌던 9.11 테러가 아닐까 합니다. 예상치도 못한 테러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 본토가 처음 공격당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9월 11일은 조금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973년 9월 11일.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피노체트가 아옌데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벌인 날이기 때문입니다. 칠레에서는 1924년 9월 11일 반보수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 조직이 움직였던 1924 쿠데타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요. 피노체트는 이전과 같은 날을 선택해 남미 최초로 선거로 수립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게 됩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사건은 매우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습니다. 육. 해. 공군에서 이미 피노체트 세력에 넘어간 군 장성들이 통신망을 장악했고, 남아있던 몇몇 친아옌데 파 군부 조직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빠르게 칠레 전역을 차지했고, 이제 남은 것은 아옌데가 남아있는 수도 산티아고의 모네다 궁전뿐이었습니다. 8시 30분 경이되자 군부는 “아옌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됐다”라고 발표했는데, 아옌데는 오히려 사임을 거절하고 측근들과 남아 끝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습니다. 또 그는 라디오를 통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번이 분명히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 저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목숨을 걸고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 그들에게는 힘이 있고 우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사회적 진보는 범죄나 무력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민중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자료: telesur) 


한편 아옌데의 결심에 대한 대응으로 군부 세력은 모네다 궁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땅에서는 육군이, 위에서는 공군 전투기가 대통령 궁에 폭탄을 퍼부었는데요. 오후 2시 반까지 교전이 벌어진 끝에 결국 아옌데는 항복 대신 쿠바 카스트로가 선물해준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며 사건은 쿠데타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이전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Dirty War)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칠레에서도 쿠데타 기간 동안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실종'됩니다. 실종된 사람들은 주로 학생, 노동자, 예술가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록됐고, 이들은 군사 정권의 고문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한편 이 사건은 단순히 칠레 국내 정치 문제가 아닌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었는데요. 최근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남미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권의 확장을 두려워했던 미국이 CIA를 통해 개입된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입니다. 인플레이션 같은 경제 위기와 사회적 혼란이 만든 칠레 쿠데타로 볼 수 있지만, 결국 냉전이란 국제적 상황이 만든 쿠데타였다고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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