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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Sep 19. 2022

미국이 아이티에 군사 작전을 결심했던 이유는?


1994년 9월 19일. 미국은 아이티의 민주주의 유지를 위한 군사 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이른바 ‘민주주의 유지 작전' (Operation Uphold Democracy)이라 불리는 이번 미션은 1991년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라울 세드라스를 몰아내고,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쫓겨난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정권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군사 개입까지 고려했던 이유는 1990년대 초 아이티 상황이 굉장히 불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티는 뒤발리에 가족이 30년 가까이 (1957-1986년) 나라를 다스리면서 사실상 민주주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는데요. 1986년에야 군부가 개입해 독재를 막아섰고, 1990년에는 민주주의 선거가 진행되며 아이티에도 변화가 생기는 듯 보였습니다.


1990년 선거 당시 대중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은 건 아리스티드였습니다. 카톨릭 신부 출신이었던 그는 일명 라발라스 운동 (Lavalas Movement)을 통해 경제 개혁과 함께 부정부패를 끝내고, 군부 정권 동안 희생당한 사람들을 치유하겠다고 약속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뒤발리에 정권 동안 이익을 챙기던 엘리트 그룹과 군 관계자들은 아리스티드의 활동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결국 1991년 발생한 것이 쿠데타였습니다. 라울 세드라스 장군은 군대를 동원해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몰아냈고, 또 다른 군부 정권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미국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수 만 명의 아이티 난민들이 정치적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미국으로 망명 와 있던 아리스티드가 지속적으로 미국 정부에게 ‘민주주의 재건'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미국은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직에 복귀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약속했습니다. 또 미국은 아리스티드와 세드라스 정권 사이에서 평화적인 해결점을 찾기 위해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든 것이 무산됐고, 결국 미국은 1994년 7월 UN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안 승인을 받아 군사 배치를 고려하는 상황까지 놓이게 됩니다. 


1994년 9월 15일. 클린턴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아이티에 대한 미국의 군사 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세드라스 정권을 압박하는 동시에, 물밑으로는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협상을 계속 진행했는데요. 군사 작전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세드라스 장군은 미국의 요청에 합의하며 사임을 결정했고, 이로써 아리스티드는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하게 됩니다.


극적인 합의가 결정되자,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군사 작전의 임무를 ‘전투 작전’에서 ‘평화 유지 및 아이티 재건 작전’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렇게 약 2만 명 규모의 미국 평화 유지군은 1994년 9월 19일부터 1995년 3월 31일까지 아이티에 머무르며 민주주의 재건을 도왔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유엔군이 아이티에 파병되어 주요 역할을 대체했고, 미군은 2000년대까지 남아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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