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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Sep 20. 2022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 이야기


오늘의 주제는 아르헨티나의 중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해 지도를 살펴보면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는데요. 행정적으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CABA) 있고,  주변에는 같은 이름의 부에노스아이레스  (provincia)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같은 이름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도 주와 도시가 나눠지게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처음 독립부터 시작됐습니다. 항구를 끼고 상업이 빠르게 발전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다른 주 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부유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문제가 가장 명확히 드러났던 건 의원 수를 정할 때였는데요. 지방의 다른 주 들은 의회에서 각 주를 대표하는 의원 수를 주 당 2명씩 똑같이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인구 밀도가 가장 높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인구수에 비례해 의회 대표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주의 평등과 인구수를 고려한 권력의 분배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양측의 입장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게 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1853년 주 당 각각 2명의 대표를 선출한다라는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연방주들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 헌법 내용을 거절했고, 결국 아르헨티나는 내전을 벌이게까지에 이릅니다.


다른 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에 힘겨루기는 약 6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880년 아베야네다 대통령 임기 기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요. 투쿠만 주 출신이었던 아베야네다 대통령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독립적인 수도로 분리시키겠다’라고 발표한 뒤 이를 법으로 발의하기 위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경제의 핵심 부분을 잃을 위기에 처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당연히 이 법안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주지사였던 테헤도르는 군대를 동원하고 민병대를 모집해 아베야네다 대통령의 결정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에 아베야네도 물러서지 않고 똑같이 무력으로 대응하며, 아르헨티나에선 결국 또 다른 내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푸엔테 알시나, 로스 코랄레스, 산호세 데 플로레스 같은 전투를 벌인 양측은 총 3천 명이 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치열했던 전쟁에서 승리를 차지한 건 아베야네다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베야네다는 1880년 9월 20일, 법령 제1029호를 승인하여 오랜 갈등을 초래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이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Ciudad Autonoma de Buenos Aires)가 수도로 탄생하여 국가 행정과 경제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Provincia)는 다른 주들과 똑같은 정치적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에는 약 3백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는 1,5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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