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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Sep 21. 2022

스페인을 위해 싸웠던 한 원주민의 아이러니한 이야기  


1740년 9월 21일. 페루 쿠스코에 있는 친체로에서 마테오 푸마카우아 (Mateo Pumacahua)가 태어났습니다. 원주민 출신이지만 스페인 왕국을 위해 충성을 바쳤고, 원주민 저항의 아이콘 투팍 아마루 2세를 생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다른 카우디요와 함께 페루 독립을 위해 싸우다 세상을 떠났던 푸마카우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루기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굵직한 내용들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투팍 아마루 2세 이야기도 ‘투팍 아마루 2세가 쿠스코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스페인 왕국이 이를 진압했고 그의 사지를 찢어 죽였다. 다시는 똑같은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원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정도의 중요한 사실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조금 더 파헤쳐보면, 스페인 왕국은 직접 스페인 사람들을 보내 군대를 조직하기보다 원주민들을 징집해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각 지역의 지형을 잘 파악하고 있어, 스페인 왕국에게는 전략적으로도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테오 푸마카우아는 1870년 투팍 아마루 2세의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원주민 왕실 군대를 이끌었던 수장으로, 그의 반란을 진압하고 스페인의 통치를 더욱 굳건히 만들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푸마처럼 예리하게 관찰하고 감시한다’라는 뜻을 가진 푸마카우아는 이번 공으로 스페인의 더 큰 신임과 함께 인디오 귀족칭호도 얻게 됩니다.


1810년부터 페루의 독립운동이 시작될 때에도 푸마카우아는 스페인 편에 서서 독립군들을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 돌연 마음을 바꿔 독립군을 위해 싸우기로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넘지 못하는 현실적 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투팍 아마루 2세 진압 때에도 정작 더 많은 공을 가져갔던 건 스페인 출신의 총독 아구스틴 하우레구이였는데요. 심지어 반란 내내 쿠스코가 아닌 리마에 있었음에도 푸마카우아보다 더 많은 명성과 신뢰를 쌓게 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유했던 아시엔다를 비롯해 지위를 모두 내려놓은 푸마카우아는 70세에 가까운 많은 나이에도 페루 독립을 위해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3세기 동안 이어진 스페인 통치가 당연히 여기던 시절, 아마 푸마카우아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동족의 배신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저 스페인 왕국에 명령을 받아 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페인이 약해지며 식민 지배에 대한 의문이 쌓이자, 그도 스페인이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닫고 독립군에 참여하여 싸운것으로 추측됩니다.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베테랑 푸마카우아였지만, 독립운동 초기 많은 지원이 없어 승리를 거두기 쉽지 않았습니다. 우안타 (Huanta), 차칼타야 (Chacaltaya)에서 스페인 군과 싸웠지만 패했고, 결국 1815년 3월 벌어진 우마치리 (Umachiri) 전투에서 생포되어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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