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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Oct 09. 2022

볼리비아 산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한 체 게바라


1967년 10월 9일. 20세기 중반 혁명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체 게바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볼리비아 산골짜기에 있는 조그만 마을 라 이게라 (La Higuera)에서 볼리비아 군인들에게 사로 잡힌 뒤 처형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그의 꿈도 영원히 중단되고 맙니다.


1959년 쿠바 혁명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한 체 게바라는 이후 카스트로 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농림부 장관을 맡아 토지개혁을 이끌었고, 중앙은행을 만들어 경제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또 외교관으로도 활약하며 UN 연설을 했고, 북한과 소련을 방문하여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등 새 정부의 성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쿠바가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서로 의견이 충돌했습니다. 관계가 악화된 체 게바라는 모든 관직에서 손을 떼겠다는 편지를 남긴 채 돌연 쿠바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내전이 일어나고 있던 아프리카 콩고로 쏠렸습니다. 정부직을 맡는 정치인보다는, 그곳에서 아프리카 해방을 위해 직접 싸우겠다는 혁명가 다운 생각으로 다시 총을 잡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환경은 그가 활약했던 쿠바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그는 이번엔 군사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볼리비아로 눈을 돌렸습니다. 당시 볼리비아에서는 1952년 혁명을 일으켰던 MNR정권이 물러가고, 1964년 쿠데타를 일으킨 바리엔토스가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체 게바라는 ‘억압받는 볼리비아 농민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몇몇 동료들을 이끌고 볼리비아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기대와는 달리,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기대하는 농민들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볼리비아는 이미 1950년대 한 차례 토지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쿠바와 비교했을 때 혁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여론이 형성되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또 볼리비아 정권은 미국의 군사 지원을 받아 체 게바라의 게릴라 부대보다 군사적으로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었습니다. 결국 볼리비아에서 힘든 투쟁을 벌여나가던 체 게바라는 산타크루즈 주 산골짜기 라 이게라 부근에서 생포되어 3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혁명과 냉전이 중남미를 뒤덮은 20세기 중반의 역사에서 체 게바라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여러 의미에서 놀랄만한 소식이었습니다. 정치적 시각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나뉘고 있지만, 이후 체 게바라는 세계적인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고 중남미 현대 정치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로 남게 됩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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