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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Nov 14. 2022

볼리비아 원주민들의 영웅, '투팍 카타리' 이야기


페루 쿠스코에서 투팍 아마루 2세 (Túpac Amaru II)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항했다면, 볼리비아에서 지역에서는 투팍 카타리 (Túpac Katari)가 원주민들의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아이마라 출신으로 1781년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비록 같은 해 체포당하며 11월 14일 세상을 떠났지만, 현재 볼리비아 국민들에겐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750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카타리의 본명은 훌리안 아파사 (Julian Apaza)였습니다. 훌리안은 어렸을 적 보통 사람들처럼 코카를 재배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는데요. 그러나 그는 페루 투팍 아마루 2세의 영향을 받아 볼리비아에서 원주민 반란군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리더십을 바탕으로 카타리는 총 4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모으는 데 성공했고, 아마루와 같이 ‘찬란한', ‘고귀한'이란 뜻을 가진 투팍이라는 명칭을 얻게 됩니다.


반란을 일으킨 투팍 카타리의 주 목표는 라파스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라파스는 스페인 당국의 행정 역할을 하던 중요한 요충지였고, 원주민을 억압하는 모든 정책들이 실행되던 곳이 었습니다. 1781년 그는 군사를 동원하여 라파스 주변을 에워쌌고, 당시 총독이었던 아구스틴 데 하우레기 (Viceroy Agustín de Jáuregui)를 압박했습니다.


반년 넘게 이어진 반란은 결국 강력한 스페인 군의 저항, 그리고 내부 분열로 인해 실패로 끝났습니다. 먼저 스페인 당국은 아르헨티나에서부터 군대 지원을 통해 반란군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라파스에서도 우월한 군사 전략을 바탕으로 포위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또 스페인은 회유 정책을 통해 원주민들을 분열시켰고, 리더였던 투팍 카타리도 측근들의 배신으로 스페인 군에 의해 체포되고 맙니다.


투팍 카타리는 처형당하기 직전, “나는 돌아올 것이며, 그때 나는 수백만이 될 것이다” (Volveré y seré millone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보여줬던 저항 정신은 수많은 볼리비아 원주민들이 이어나갈 것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실제로 볼리비아에서는 그의 이름이 붙은 원주민 저항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세월이 흐른 1970년대에는 카타리스타 (Katarista) 운동을 통해 아이마라 사람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현재 투팍 카라티는 그와 함께 저항에 참여했던 아내 바르톨리나 시사 (Bartolina Sisa)와 함께 볼리비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 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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