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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Dec 18. 2018

#3 한국 경제의 기적,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적


한국 경제의 기적,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적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놀라워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 경제 성장이다. 한국은 불과 50년 전 만해도 빈곤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잘 사는 나라 (물론 아직 갈길이 멀지만...)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한국의 성장 사례는 경제 수업시간에도 하나의 좋은 예로 자주 쓰이곤 한다. 


그런데, 한국만큼이나 수업 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아르헨티나다. 안타깝게도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부유했던 국가가 경제 침체 늪에 빠진 예로 자주 나오곤 한다. 실제로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 아르헨티나 경제 수업을 가르치던 교수님께서는 아르헨티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경제 기적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 아르헨티나에서도 경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완전 다른 의미의 기적이긴 하지만요." 


교수님은 한국 경제와 아르헨티나 경제를 '기적 (milagro)이란 단어로 비교했다. 한국에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경제성장이 일어나는 동안, 아르헨티나에서는 거꾸로 경제가 추락하며 경제 침체가 일어난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얼마나 경제가 추락했길래, 기적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비교를 한 걸까?' 



부유했던 아르헨티나 


사실 아르헨티나는 처음부터 못 사는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유럽 국가들 보다도 훨씬 더 잘 사는 국가였다. 특히 1920년대는 아르헨티나의 황금기라고 불렸던 시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때 당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전 세계 10위안에 속할 정도로 튼튼했다.




192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남미 대륙에서 가장 발전된 곳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남미 최초의 지하철이 생겼고, 세상에서 제일 큰 7월 9일 도로가 놓였다 (이는 아직까지도 제일 넓은 대로로 남아있다). 또한 대로 한가운데 놓여있는 오벨리스크, 콜론 극장, 코리엔테스 영화거리, 그리고 박물관과 미술관이 생기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 문화의 중심지이자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성공 스토리는 대서양 건너의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고통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유럽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라는 부유한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당시 미국이 이른바 "아메리칸드림"으로 유명했던 것과 같이, 아르헨티나도 '아르헨티나 드림'으로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1910년과 1919년 사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에서는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와 정착을 했다. 그만큼 아르헨티나는 기회의 땅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잠재력 있는 국가였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의 시작   


그런데, 잘 나가던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 이후 정체기에 빠지게 된다. 물론 미국에서 터진 경제 대공황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치인들 때문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경제 성장으로 인해 새로운 중산층 계급이 형성되었던 시기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엘리트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던 권력을 잃게 될까 두려워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대중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제한하고, 그들의 정치적 참여를 최대한 늦추도록 했다. 


이러한 보수층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했던 UCR당의 이폴리토 이리고옌 (Hipolito Hyrigoyen) 대통령이 1927년 선거에 당선되었다. 이리고옌은 앞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투표권을 행사하자'라고 주장할 만큼 진보적이고 노동 계층을 대변하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3년 뒤, 이리고옌은 1930년 보수층과 연합한 군부대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된다. 이른바 '암흑의 십 년' (Decada Infame)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 쿠데타는, 아르헨티나가 조금 더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갈 수 있었던 길을 막아 버린 사건이었다. 


1930년 보수파와 대중 및 노동계급 간에 일어났던 정치적 혼란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조금씩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운데, 경제가 발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 (Juan Perón)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포퓰리즘 정책을 통해 잠시 경제를 회복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는 다시 침체기에 빠졌고,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계는 페론 지지자들과 반 페론주의자들이 팽팽히 맞서며 혼란의 정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약 40년 동안 혼란을 겪은 아르헨티나 정치는 곧바로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이른바 '잃어버린 40년'이나 다름없었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더 이상 1920년대의 '황금시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이, 정치인들은 실용적인 해결책을 내놓으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좌파(페론주의자)와 우파(반 페론주의자)로 나뉘어 이념 싸움을 하느라 바빴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키겠다는 명분으로, 1976년에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해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경제 상황은, 무능한 군부정권을 만나며 깊은 암흑기에 빠지게 된다. 


비록 1980년대 초 민주주의 정권이 돌아오긴 했지만, 경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1983년의 경제위기, 1989년의 하이퍼인플레이션, 2001년 국가 디폴트, 그리고 2018년 IMF 위기까지. 마치 도미노처럼 계속되는 위기의 악순환 속에서, 아르헨티나는 경제는 좀처럼 불황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이다. 



아르헨티나가 주는 교훈



아르헨티나의 끝없는 경제 위기의 시작은 정치 문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르헨티나 정치 엘리트들은 대중들의 참여를 억압시키며, 아르헨티나의 정치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기회를 놓쳐버렸다. 만약 쿠데타가 일어나는 대신 점진적 정치 개혁이 일어났다면, 아르헨티나는 부정적인 의미의 '경제적 기적이' 아닌, 긍정적인 의미의 '경제적 기적'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특히 이념에 얽매여 실용적인 정책을 도출해 내지 못하는 현 정치인들에게 교훈을 남긴다. 국내 정치인들이 깨달아야 할 점은, '과거에 이룬 한국의 경제 기적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기적'이 그대로 기적의 역사로 남으려면, 국내 정치의 선진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르헨티나가 놓쳐버린 정치의 변화는 곧바로 포퓰리즘과 군사정권으로 이어졌고,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다시 한번 1920년대의 황금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아르헨티나는 부정적인 '경제 기적'이란 20세기의 기억을 가진채, 여전히 반복되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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