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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Dec 08. 2018

멕시코 최고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  


1886년 12월 8일, 20세기 멕시코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가 태어났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과나후아토(Guanajuato)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 멕시코 출신의 유명한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 (Frida Kalho)의 남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 미술 유학파 


디에고의 그림 실력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뛰어났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겨우 10살의 나이로 멕시코 시티로 건너가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 예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공부를 마친 후 자신의 그림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마드리드와 파리에서 생활을 하던 디에고는 그곳에서도 재능 있는 화가로 인정받았습니다. 폴 고갱과 헨리 마티스와 같은 유럽 최고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훗날 스페인 출신 피카소와도 친분 있는 관계를 유지하며 입체파(Cubism)를 대표하는 화가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갔습니다. 


Portrait of Ramon Gomez de Serna (Wikipedia Commons)



"벽화"


디에고 리베라가 유럽에 있는 동안 멕시코에는 혁명 (1910-1917)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이 생긴 그는 이후 멕시코의 민중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유럽 내에서 자신이 쌓아놓은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변부나 다름없었던 멕시코로 돌아가 화가의 길을 가는 것은 당시엔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간 후 디에고는 당시 멕시코 교육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셀로스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멕시코 민중운동에 참여해 멕시코의 위대한 민족성을 알릴 수 있는 거대 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는데요. 마침 민중을 위한 화가가 되길 원했던 디에고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후 역사에 남을만한 여러 유명한 벽화들을 남기게 됩니다.


과달라하라주 정부청사에 있는 벽화 (theculturetrip.com)


디에고를 대표하는 벽화 작품은 대부분 멕시코시티와 과달라하라에 남겨져있습니다. 이곳에 거대한 벽화들은 대부분 멕시코의 독립과 역사의 관한 그림들인데, 멕시코 민중들을 그려냄으로써 멕시코인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려진 것이었습니다. 


알라메다 공원에서의 일요일 오후의 꿈 (wikipediacommons)


또 멕시코시티에는 디에고 리베라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엔 '알라메다 공원에서의 일요일 오후의 꿈 (Dream of a Sunday Afternoon in Alameda Park)'이라고 불리는 벽화가 있는데, 여기엔 스페인 정복자 헤르난 코르테스, 여성작가 소르 후아나, 혁명군을 이끈 판초 비야 같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거대한 벽화는 멕시코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한 번에 볼 수 있을 만큼 흥미롭게 그려졌습니다. 


디에고는 거대한 벽화 이외에도 일반 작품들을 남기며 활동했습니다. 그가 유럽 생활 시절 받아들였던 입체주의에서 벗어나, 후기 인상주의를 띄는 '테후아나의 여인들 (Tehuana Women)', '테후안테펙의 목욕하는 사람 (Bather of Tehuantepec)', '꽃 축제 (Flower Festival)과 같은 유명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flickr.com)


디에고 리베라가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 때문입니다. 디에고 리베라는 이미 두 번 결혼을 하고 아이도 셋이나 가졌지만 프리다 칼로가 가지고 있던 매력에 사로잡혔습니다. 물론 프리다 작품이 훌륭했기 때문에 그녀의 예술성에 반했을 수도 있지만, 디에고는 프리다 그녀 자체가 있던 매력 자체에 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디에고는 마흔네 살, 프리다는 스물한 살의 나이였지만 예술적 동료로서의 그들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프리다 칼로는 신체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을 이겨낸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디에고는 그런 프리다를 지켜주기보다 여성편력 때문에 자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1939년에 이혼했지만 1년 뒤 다시 재혼하게 됐고, 이후 다시 한번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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