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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티너리 Dec 10. 2018

노벨 문학상을 받은 중남미 작가들


1971년 12월 10일과 1990년 12월 10일, 19년이란 세월을 두고 중남미 대륙에서 두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그 주인공은 칠레를 대표하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와 멕시코를 대표하는 작가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였는데요.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옥타비오 파스는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파블로 네루다와 작품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wikipedia)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중부의 조그마한 도시 파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 지 2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로 인해 네루다는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네루다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대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단지 13살의 나이로 지역 신문에 그의 첫 작품을 발표했으며, 19살에 나이에 썼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라는 제목의 책을 발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파블로는 단숨에 칠레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시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후 네루다는 칠레 산티아고 대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어와 교육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멕시코의 멕시코시티를 돌며 영사직을 맡았습니다. 특히 스페인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라파엘 알베르티, 페데리코 로르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 같은 작가들과 친분을 쌓았고 그곳에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쓴 "마음속의 스페인 (España en el corazon)"을 발표했습니다. 


해외 생활을 마친 뒤에는 칠레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며 '포도들과 바람 (las uvas y el viento)', 세상의 종말 (fin del mundo), 하늘의 바위들 (Las piedras del cielo)를 발표했습니다. 이 같은 활동을 바탕으로 1971년 12월 10일 파블로 네루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옥타비오 파스와 작품들 


멕시코를 대표하는 작가 옥타비오 파스는 네루다와 마찬가지로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집안은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부유했지만 1910년 일어났던 멕시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버지가 실패하며 재산을 몰수당하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옥타비오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문예가로의 길을 걷게 됐고, 18살엔 자신의 첫 번째 시집을 '야생의 달' (luna silvestre)를 발행했습니다. 


에미니오 마르티네스와 옥타비오 파스 (wikipedia commons)


이후 옥타비오 파스는 외교관 자격으로 인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곳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원숭이 문법가' (El mono gramático)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그의 첫 번째 아내 엘레나 가로 (Elena Garro)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1945년에는 옥타비오 파스를 대표하는 작품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soledad)를 파리에서 발표했고, '현대 멕시코와 멕시코인들에 대해 분석하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조국 멕시코로 돌아간 후엔 '태양의 돌' (Las piedras del sol), '하양' (Blanco), '동쪽 비탈길' (Ladera Este)과 같은 작품을 발표했고, 1990년에는 중남미 출신으로는 다섯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파블로 네루다와 옥타비오 파스의 관계 


같은 중남미 출신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와 옥타비오 파스는 서로 친분을 쌓았고, 자신이 발행한 시집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할 만큼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문학에서는 서로 친분이 있었지만, 정치적 이념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졌습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경우 스페인에서 영사직을 맡으며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옥타비오 파스는 인도에서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평화와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관념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옥타비오 파스는 "파블로 네루다가 점점 더 스탈린주의자가 되어가는 동안 나는 스탈린주의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평화를 추구했던 파스는 1968년 멕시코 학생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정부를 비판했고,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대사직을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하루 5분 중남미 역사상식 매거진에서는 그날 벌어졌던 역사를 다룹니다. 매일 알쓸신잡st 글을 통해 중남미의 시시콜콜한 역사이야기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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