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있게 짐을 꾸리고 9시 반에 숙소를 나선다.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될까 싶어 어제 다이소에서 산 뒤꿈치 보호대를 착용했다. (답답하여 오후 나절에는 벗어버렸다)
바로 옆 일식집에서 가정식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주인아주머니 말씀으로는 내일까지 길 건너에서 열리고 있는 배드민턴 대회 때문에 요 며칠간 근처에 방이 없었다고 한다. 결승전이 다가오면서 탈락자들이 돌아간 덕에 방을 잡을 수 있었으니, 나는 운이 좋았다.
밀양대로를 걷는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과 함께 출연했던 송강호의 이름을 따 '송강호 거리'라고도 부른다. 밀양아리랑 아트센터까지 직진, 좌회전해서 쭉 걸어 나가면 밀양 시내를 벗어난다.
'밀양대로'이자 '송강호 거리'의 모습이다.
시내를 벗어나 기찻길 옆으로 난 도로를 걷는다.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사람이 나란히 지나간다. 우측으로는 밀양강을 끼고 청도 방향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도로변 전봇대에 북한 여성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광고판이 걸려 있다. '북한 여성' 앞에는 '참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북한 여성과의 결혼을 주선하는 업체는 하나같이 탈북 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순수하다'고 칭찬한다. 북한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온갖 풍상을 겪은 데다가 아직은 북한의 가부장적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참하다'는 건 남성의 관점에서 몸과(돈 벌어오니까) 마음이(순종적이니까) 편하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 여성들도 조건 없이 참한 것만은 아닐 터이다.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남한 남성과의 결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탈북 여성의 수가 늘어나면서 어떤 의미로든 남한 사회의 문화에 점차 적응해 나갈 것이니 그들의 '참함'도 얼마나 지속될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까 간판에서 유독 '참한'이라는 문구만 빛이 바래어 있다.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자 식당이 두엇 나타난다. 인근에 '상동 빈지소 유원지'가 있다.
한 식당 앞에서, 개 한 마리가 어쩐 일인지 나를 반기며 폴짝댄다. 이번 여행에서 마주친 수많은 개들 중 유일하게 내게 호의를 보인 녀석이다. 다만 목줄이 너무 짧아 안쓰럽다.
유일한 호의
예전에는 이 부근에서 밀양강의 곡류를 따라 철길도 돌아나갔다. 경부선을직선화하면서 남겨진구간에는 철길을 걷어내고 도로를 놓았는데 그 길에 '상동터널'이 남아있다고 들었다.
단선 기찻길이 지나던 좁은 터널을 꼭 보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정비사업으로 길 자체가 막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잠시 서성대다 발걸음을 옮긴다.
국제신문의 <영남대로가 깨어난다> 기획기사에 실린 밀양 상동터널의 모습. 기차가 지나던 좁은 터널을 꼭 걸어보고 싶었지만 이 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출처: 국제신문)
빈지소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상동역 방향으로 향한다. '소(沼)'는 물이 고여 있는 낮은 지대를 말한다. 이곳 빈지소는 낚시꾼들이 자주 찾는다고 하는데 계절 탓인지 이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빈지소를 벗어나면 바로 상동역이다. 상동역 앞 정자에서 물을 마시고 초코바를 먹으며 잠시 숨을 고른다.
상동역 맞은편 가게에서 물을 두 통 샀다. 주인 아저씨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에 '서울까지 걸어간다'고 했다.
대답을 듣더니 아저씨는 내 신발부터 흘끗 쳐다본다. 그 신발로, 그런 옷차림으로 어떻게 서울까지 가느냐고 걱정과 의구심을 반반 섞어 물으신다. 비가 오거나 노숙을 할 상황에 처하면 어쩔 것이냐며.
웃으며 답했다. "아이고 아저씨, 그렇게 이것저것 다 따지면 여행 못하지요"
장비의 중요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실천과 의지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여전히 아저씨는 혀를 찬다. "어딘가 허술하다, 의지는 좋다마는..." 그러나 '어딘가 허술하다'는 그 말이 오히려 듣기에 좋았다. 이 정도의 장비로 국토종주에 나선 내 용기와 의지가 새삼 장했다.
청도로 올라가는 길 곳곳에 미나리를 구입하거나 먹을 수 있는 비닐하우스들이 눈에 띈다. 특히 이 지역에는 '한재 미나리'가 유명하다. 청도 인근 한재 지역에서 나는 미나리라 해서 그렇게 부른다. 다른 지역의 미나리에 비해 이런저런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먹어보진 못했다.
상동역으로부터 밀양강을 두 번 건너면 내호리가 나온다. 이 작은 마을에 '시인의 마을'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내호리에는 시조시인이었던 오누이 이영도와 이호우의 생가가 있다. 이영도 시인의 '개화'는 나도 잘 아는 작품이다.
개화(開花)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하지만 동생 이영도 시인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영도 시인과 관련된 정보를 찾다 보니 눈이 번적 뜨인다. 시인은 남편과 일찍 사별했는데, 시인 유치환이 이영도 시인을 사모하여 5천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치환의 그 유명한 시 '행복'은, 혹시 이영도 시인을 생각하며 쓴 게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유치환, '행복' 중에서)"
마을 입구에 오누이의 시비(詩碑)가 나란히 서 있다. 생가는 아쉽게도 복원공사 표지와 함께 닫혀 있었다.
생가 주변 골목에 들어서면 과거로 온 느낌이다.
압권은 '정미소'와 '소리사'다. 오랜 시간을 버텨 왔을 흙벽 안으로,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정미 설비가 벨트를 두르고 있었다.
중앙소리사는 아직 영업을 하는지 분명치 않았다. 다만 간판의 글씨체, 그리고 '소리사'라는 제목이 아련하다.
반면 제법 기대를 했던 청도 극장 건물은 빈티지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극장으로 사용되다가 방치된지 오래되었다고 들었는데 최근 새롭게 단장을 한 모양이다.
왼쪽 사진이 지금의 모습, 오른쪽이 2012년 국제신문 기사에 실린 건물의 모습이다. (오른쪽 사진출처 : 국제신문)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내 호기심을 만족시키자고 타 지역이 정체되어 있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른바 '시간여행'이 타 지역을 얕보는 나들이가 되어선 곤란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민들은 그곳의 환경에서 현재형의 삶을 살고 계신다. 시간의 흐름과 발전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골길에 네댓 개나 되는 미용실이 있다는 건 정말 미스터리다.
내호리에서 벗어나면 청도까지 이렇다 할 마을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게 안전하다.
가까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내부에는 생선 굽는 냄새가 배어 있고, 남자 손님 한 분이 주인 아주머니와 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동국을 청했다. 고동은 다슬기의 경상도 방언이다. 충청 내륙지역에서는 '올갱이'라 부른다. 해산물을 구하기 어려운 내륙지역에서 강가의 다슬기를 채취해 국을 끓여 내었다.
예전에 충청 지역에서 먹었던 올갱이 해장국과 이 지역의 고동국은 맛이 달랐다. 올갱이 해장국이 우거지 된장국과 비슷하다면 고동국은 깨가 들어가 국물이 뽀얗고 고소한 편이다.
왼편이 내호리의 고동국, 오른편이 충북 수안보의 올갱이국이다. (2016년 4월 29일 촬영)
유천길을 따라 북상한다. 이곳도 밀양강변이라 때로 수해가 발생하는 모양이다. 버려진 건물 외벽에는 '수해를 복구하라'는 목소리와 '복구했다'는 답변이 겹쳐져 있다.
시골길을 벗어나 국도로 들어섰다. 이 길의 이름은 '새마을로'다. '새마을운동 발상지' 앞을 지나 청도까지 이어지는 25번 국도의 일부다.
길 위로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저 멀리 산속에 점처럼 박힌 무언가가 보였다. '대운암'이라는 절이다. 1868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저런 사찰을 지었을지 신기한 노릇이다.
앞편(둘째 날)에서 국도변을 걷다 보면 온갖 종류의 쓰레기를 만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쓰레기를 담은 검은 봉투, 바나나 껍질, 노란 액체가 담긴 생수통 등이 단골손님이다. 하도 많이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무덤덤해진다.
그런데 간혹 섬뜩할 때도 있다. 도로변에 여행가방이 버려져 있다. 조금 열려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게다가 더 큰 가방이었다면, 오싹한 상상을 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