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차 : 청도에서 대구까지

2018년 12월 16일

by 김정환


일요일 아침이다. 8시가 안되어 숙소를 나섰다. 모텔 바로 옆이 청도시장이다. 휴일 아침이라 시장은 물론 거리도 한산하다.



당연히 문을 연 식당도 아직 없다. 걷다 보면 나타나겠지 싶어 일단 출발했다.


등산객 몇 분이 버스정류장 앞에 서 있다. 버스는 나도 등산객으로 알았는지, 내가 다가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준다. 고맙지만 갈 길과 할 일이 다르다.


청도읍 사무소 근처에는 읍민 개인 광고판이 있다. 대부분 임대 광고들이다.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지역적 특성인지, 아니면 둘이 겹친 것인지 나그네는 알 길이 없다.



청도는 이미지와 캐릭터에 신경을 많이 쓴다. 곳곳에 눈에 띄던 소 캐릭터 외에도 버스정류장마다 탐스런 감이 열렸다.



도로변 우측 넓은 공터에 소들이 모여 있었다. 철골 구조물이 있고 천장이 덮인 일반 축사와는 달랐다. 소들이 그냥 군데군데 말뚝에 매여 있다.


결정적 힌트는 타이어다. 타이어를 끌면서 체력을 키우는 이들은, 그 유명한 청도 소싸움의 전사들이다. 잠이 덜 깼는지 대부분의 소는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사진 아래에 소들의 체력 단련을 위한 타이어가 보인다.


바라보노라니 가련하다. 인간의 흥을 돋우기 위해 소들이 그처럼 잔혹하게 싸워대야 하는 것인가?


'도축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으냐'고 할 수 있지만, 싸움소도 기력이 떨어지면 결국 정육점 신세다. 운동만 한 탓에 마블링이 없어 일반 육우에 비해 헐값으로 넘겨진다. 평생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다가 결국 한 덩이 쇠고기가 되고 만다.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요 유별난 동물 권리 보호자도 아니다. 동물 학대라는 관념도 없던 시절, 농경민족으로서 소를 이용한 하나로 놀이로 소싸움을 벌인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인식도 변한다. '전통'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통용될 수 있는 건 아닐 터이다.


'소싸움'과 '한우고기' 위에 올라탄 소의 상(像)은 용맹하기보다는 가련하다.


걸은지 한 시간쯤 되었다. 발의 통증은 오른쪽이 조금 더 심하다. 쉬는 동안 오른발을 약간 높이 하고 앉아 어제 남은 반시를 꺼낸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식당은커녕 구멍가게도 하나 없었다. 어쩌면 이걸로 끼니를 때워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가방 안에는 아직도 삼랑진에서 산 빵이 하나, 초코바 두어 개가 남아 있다.



날이 흐리다. 오늘은 점심나절 눈 예보가 있다. 저 멀리로 겹겹이 펼쳐진 산등성이들을 보자 한숨이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인 대구로 가려면 저 산들을 굽이굽이 헤쳐 넘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오른쪽 발의 통증을 조금 덜 수 있는 보법(?)을 개발했다. 발에 힘을 빼고 뒤로 차올리듯 걸으니 조금 나았다. 아킬레스건에 부담이 가는 건 단점이다.



쭉 서쪽으로 걷다가 우측으로 틀어 대구 방면을 향한다. 얼마 되지 않아 연지, 즉 연꽃 연못과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유호연지'와 '군자정'이라는 곳이다.


구구한 설립 배경이 있으나, 더 흥미로운 건 이 곳에 깃든 이야기다. 조선시대에는 소박을 맞지 않은 이상 출가한 여인이 친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근방으로 시집온 여인들과 친정 가족들은 거리상 중간쯤 되는 이 곳에서 명절에 한 번씩 만나 회포를 풀고 돌아갔는데, 이를 '반보기 풍습'이라 부른다. 반나절 가량 만나고 헤어져야 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속설도 있다.


시댁살이로 눈물을 삼키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는 그 애틋함은 오죽했을 것이며, 반나절 짧은 만남 뒤에 또다시 헤어져야 하는 그 아쉬움은 또 오죽했을 것인가. 활짝 핀 연꽃은, 그래서 더 야속했으리라.



가끔 특색 있는 빵집들이 보인다. 우리쌀 혹은 우리밀을 내세웠는데, 나의 호기심이나 허기를 달래기엔 내가 일요일 아침 길을 너무 빨리 나섰다.



걸은지 두 시간째. 드디어 식당이 보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손사래 퇴짜를 맞고는, 결국 비상식량 체제로 마음을 굳혔다.


길 건너로 '한국코미디타운'이 '청도 박물관'과 나란히 위치해 있다. 여행 당시만 해도 나는 이곳이 개그맨 전유성씨의 코미디 공연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전유성씨의 개그 전용 극장은 2011년에 문을 연 '철가방 극장'이다. 4400여회의 공연과 20만 명의 관람객을 이끌었으나 경영난으로 2017년 4월 이후 문을 닫은 상태다.


비록 '철가방 극장'은 문을 닫았다 해도, 생뚱맞게 청도에 코미디타운이 생긴 데에는 아무래도 전유성씨의 공로가 컸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청도군과 전유성씨의 끝은 좋지 못했다. 전유성씨는 2015년 시작된 '청도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기획의 주축으로서 1~3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는데, 4회 대회부터 청도군이 이유 없이 그를 배제했고, 상심한 전유성씨는 청도를 떠났다는 것이다. 남겨진 '한국코미디타운'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흥할지 지켜볼 일이다.



간간이 오가던 눈발이 차츰 굵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국도 구간이다. 일단 코미디타운 맞은편 버스정류장 안에서 눈과 바람을 피해 비상식량을 꺼냈다.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옷을 단단히 여민다. 도로에는 눈이 하얗게 쌓이기 시작했다.



십여 분을 걷자 '목림교차로'가 나타난다. 여기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팔조령이다. 영남대로상의 고개 중 문경새재(조령) 다음으로 높은 고개다. 고갯길에 도적이 많아 주막에서 장정 여덟 명씩 한 조를 이뤄서야 함께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하여 팔조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팔조령을 굽이굽이 오르내리는 언덕길이 있지만 나는 과감하게 30번 지방도를 택한다. 눈길에 차들이 오가는 위험, 무엇보다 팔조령 터널을 지나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하나 대구까지 오늘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에둘러 갈 여유가 없다.



경사가 점점 심해진다. 언덕을 올라갈수록 눈발이 정면에서 불어 닥친다.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눈으로 따갑게 파고드는 눈송이들을 피하기는 어렵다. 차들이 계속 오는 정면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선 감수해야 할 고통이다.



팔조령을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꽤 길었다. 악천후에다 오르막길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라갈수록 산 아래의 풍경이 달라지는 건 확연히 느껴진다. 고개 정상이 가까워지자 꽤 높이 올라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도로 옆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처음에는 동파사고인 줄 알았으나, 군데군데 노즐에서 비슷하게 물이 분사되고 있다. 그간 별 생각 없이 스쳐 지났던 '염수분사구간'이라는 말의 의미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 눈길 사고 위험이 심한 곳에서 눈이 얼어붙는 걸 막기 위해 소금물을 뿌리는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팔조령 터널이 드디어 눈앞이다. 이곳이 고개 정상이다.



터널에 들어서자 차들 지나가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저 멀리서부터 '쐐애애애애애액-' 점증되다 절정의 순간에 내 옆을 스쳐간다. 한 대의 소리도 그럴진대, 십여 대가 연이어 다가올 때에는 마치 전투기 출격 현장에 온 듯했다.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출구가 보여 심리적으로는 금방 도달할 것 같지만 터널 길이는 720미터로 그리 짧지만은 않다.



무사히 터널을 벗어났다. 이제부터는 길도 내리막이다. 다만 눈이 쌓여 조심해야 한다. 다행히 이날 눈은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사람 만들 때 잘 뭉쳐지는 눈이어서 미끄러움이 덜했다.



팔조령을 넘었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겹쳐 발과 다리가 갑자기 아파 온다. 어제부터 이 코스에 신경을 많이 썼다.


길가에 보이는 한 요양병원 정자로 무작정 들어갔다. 눈을 피하면서 다리를 펴고 꿀맛같은 휴식을 취한다. 시간은 오전 11시 4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몸이 아주 식기 전에 다시 길을 나선다. 눈을 밟으며 걷는 일에 익숙해졌지만 주변을 돌아볼 여지가 별로 없어 지루하다.


심신이 지쳐갈 때즈음 식당 몇몇이 모인 마을이 나온다. 일단 눈에 띄는 대로 따뜻한 국물을 찾아 설렁탕집으로 들어섰다. 펄펄 끓는 설렁탕을 앞에 놓으니 벌써 몸이 풀리는 듯하다.



눈발은 조금 잦아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속해서 대구 방향으로 걷는다.


그러다 한 철물점을 만났다. 그런데 철물 외에, 담배와 동물 사료도 취급하시는 모양이다. 가게 앞으로는 오뎅을 파는 시설까지 갖춰져 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큰 교훈 중 하나다.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으리라. 100을 할 수 있음에도 40에 머물며, 자기 삶의 범위는 딱 그만큼으로 여기는, 바로 나같은 사람들도 다수일 것이다.


남들과 라이프스타일을 견줄 필요는 없다. 다만 내 자신이 보기에도 삶이 너무 안일하지 않았던가 반성한다. 전국 방방곡곡, 자신의 환경과 상황 안에서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들 살아가고 있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따라 걷는다. 걷는 동안 점차 날이 개었다.



휴식이 필요할 즈음, 음식점과 커피숍이 모여 있는 '전원 음식점지구'가 나온다. 맞은편 산자락에 눈썰매장과 스파 등 위락시설이 있어 함께 조성된 모양이다. 정면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에스프레소 싱글 한 잔과 따뜻한 물을 부탁했다.



내부는 상당히 넓고 인테리어가 훌륭하다. 이 정도면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철학의 산물이다. '인테리어와 건축의 일체를 지향한다'던 입구의 글귀에 수긍이 갔다. 마치 유럽의 박물관에 온 듯하다.



날이 완전히 개었다. 눈이 녹으면서 길도 한결 걷기 좋아졌다. 대구 시내로 진입하기 전 '가창'을 지나는 중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이다.



이곳은 찐빵으로 유명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5개에 3천 원, 가격도 착하다.


찐빵이 데워지는 동안 주인 아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가게가 오래된 것 같다는 물음에 20년이나 되었다고 하신다. 나의 여행 이야기를 듣더니 '별난 분이네'라며 빵을 6개 담아 주신다. 감사하다.



추운 날, 갓 쪄낸 찐빵은 일품이다. 얼른 하나를 집어 든다. 팥소 안에 밤이 들어 있어 더욱 맛이 좋다.



신천변으로 접어들었다. 천을 따라 쭉 올라가면 대구 시내로 진입한다.



천변은 산그림자에 가려 아직 눈이 녹질 않았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아이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이와 눈사람의 모습을 엄마는 연신 사진에 담는다. 그 모녀의 모습이 더 예쁘다.



사실 이 길도 꽤 길다. 나는 중간에 빠져나왔지만 대구 시내를 관통하여 금호강까지 이어진다. 이날 신천을 따라 걸은 거리만 4km가량 된다.


고층아파트들이 보이는 걸 보니 이제 대구 시내로 들어서는 모양이다.



신천을 벗어나 시내로 진입한다. 큰길 안으로 들어가면 대봉네거리 방향으로 왕복 2차로 또는 4차로의 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이 영남대로의 흔적이다.



대봉네거리까지 왔다. 영남대로의 자취를 따른다면 여기서 옛 대구읍성 쪽(지금의 반월당 부근)으로 곧장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이 있어 둘러 가기로 한다.



김광석길로 가는 길 좌우로 결혼 관련 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드레스부터 사진 촬영, 신혼여행까지 이 거리에서 모두 해결 가능하다.



김광석길은 수차례 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어 다시 둘러본다.


김광석.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나는 그의 노래에 심취했다. 독학으로 배운 기타를 더듬거리며 부른 노래도 그의 주옥같은 명곡들이었다.


20대 초반의 감수성은 이후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김광석의 음색과 노랫말이 얽혀 내 20대의 감성이 되었고, 그 상태에서 그가 떠났기에 결국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건 내 20대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공익근무요원 복무 중 첫 휴가를 받고 강화도 마니산으로 혼자 여행을 가던 1996년 1월이었다. 좌석버스 앞자리 아저씨가 보던 스포츠 신문의 머리기사가 그의 자살소식이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는 사람이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에 따라 삶도 그렇게 된다고 하셨다. 노사연의 '만남'이 유행하던 게 1991년이다. 당시에도 자신을 노처녀라고 코미디 소재로 삼았던 노사연은 결국 38살이던 1994년에 이무송과 결혼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던 김광석은 불과 33살에 그렇게 멀어져 갔다.



오늘은 예전에 묵은 적 있는 동성로 인근의 모텔에서 잘 생각이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인지 도로에 차가 많아졌다.



모텔에 도착한 게 5시 40분 경이다. 방을 청했더니 '원래 숙박은 6시부터인데...'라며 하나 남은 방의 키를 건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지금이면 한참 대실 손님들이 많을 시간이다. 숙박 손님이 벌써 들어오면 방의 회전이 안 되어 모텔에는 손해인 것이다. 이날 이후부터 숙소를 검색할 때는 몇 시부터 체크인이 되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기억대로 방의 시설이 좋다. 무엇보다 공간이 널찍하다. 월풀 욕조도 큼직해 물을 가득 담아 여유 있게 몸을 풀었다.



출출하다. 길 건너 동성로 거리로 향한다.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골목이다.


동성로는 말 그대로 성의 동쪽 길이다. 대구읍성을 허물면서 동쪽 성벽 자리로 낸 길을 동성로라 불렀다. 같은 식으로 대구읍성의 자취는 '북성로', '서성로', '남성로'라는 이름에 둘러싸여 있다.



처음 보는 '닭곱새'를 먹어 보기로 했다. 부산은 '낙곱새(낙지+곱창+새우)' 요리가 유명한데 그걸 응용한 모양이다. 스톱워치까지 갖다 놓고 정확히 시간을 맞춰 끓여 낸다. 밥에 비벼 먹는 그 맛이 제법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밤마실을 나섰다. 크리스마스 시즌답게 대구백화점 근처에는 대형 트리가 들어섰다. 거리에도 오색 조명들이 일요일 밤거리의 흥을 돋우고 있다.



그러다 어느 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매장 안이 환히 밝은데, 주제는 성인용품이다. 보통 성인용품 매장은 입구를 두껍게 코팅하거나, 음침한 느낌의 구석 또는 2층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지만 여기는 달랐다.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다.



매장은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에는 비교적 소프트(?)한 품목들, 예를 들면 피임기구나 속옷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행복을 위한 인간의 다양한 발명품을 만나볼 수 있다.


모자이크 너머는 짐작만 하시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도 개방적인 성인용품샵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밝은 분위기에 재미있는 만화나 문구를 곁들여 유쾌하게 꾸며 놓은 대구의 성인용품 매장이 더 나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성인용품점의 진열장이다. (촬영: 2016년 12월 13일)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물음에 사장님은 흔쾌히 좋다고 하신다. 30대 중반의 남자분으로, 제품의 용도와 작동법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노인이나 장애인과 같이 성에서 소외된 분들의 이야기, 내 여행 이야기로 주제가 확장되었다. 걸어서 국토종주를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인사하고 나오는 나를 배웅하면서 나중에 대구에 오면 꼭 들르라고 하신다. 이렇게 또 한 번, 길 위에서 유쾌한 만남을 남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뭔가 쾅쾅 소리가 울린다. 클럽들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길가로 난 문을 다 열어놓고 저렇게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아도 되는 건지 싶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별 문제를 못 느끼는 듯하나 공공장소에서의 엄연한 소음공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벌써 꼰대라는 뜻일까?


이렇게 소리 커도 됨?


주점 안에는 20대 청춘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은 저렇게 술을 먹지 않지만 나도 언제 어디서든 술에, 사람에, 이야기에 취해 거침없이 내달리던 때가 있었다. 왠지 오늘따라 꼰대스런 생각이 잦다.



숙소로 돌아와 잘 채비를 하고 눕는다. 오늘 걸은 거리는 대략 34km가량이다. 눈보라를 뚫고 팔조령을 넘어 대구까지 왔다. '수고했어, 오늘도'.




* 2019년 1월 2일부터 필자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latos 에 연재했던 '걸어서 국토종주' 의 글을 각색해 브런치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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