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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Jul 02. 2022

[오늘의 私설] 혐오와 애착, 동전의 양면


 코로나19로 바뀐 일상 중 하나가 거의 모든 골목과 도로에서 마주치는 오토바이들이다. 가끔 현란한 불빛으로 나의 시선을 강요하거나 굉음으로 주의를 강제하는 오토바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들을 만나면 짧게는 2~3초, 길게는 십여 초 넘게 불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잠잠해진 후에 뒤따르는 정서는 혐오다. "아따, 거 양아치새끼..."


 분노를 가라앉힌 나는 애마 ‘로시난테’에 오른다. 로시난테는 내 모터사이클의 별명이다. 녀석과 함께 하는 시간에 나는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다. 출발 전 검정색 바디와 은빛 크롬의 배기구를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고 시동을 걸면, 달려 나갈 때의 청량감도 그만이지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짜릿하다. 부러움과 감탄의 눈빛에 호응하기 위해 허리는 꼿꼿이 펴고, 차를 운전할 때면 속도를 높였을 노란 신호등 앞에서도 반드시 멈춘다. 길을 건너는 보행자들에게 늠름한 자태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앞서 말한 혐오의 대상, 즉 조악한 조명과 굉음의 질주를 ‘오도바이질’이라 불러 보자. ‘오도바이’라는 말은 ‘오토바이’보다도 이륜차의 급을 더 낮춘 어감이다. ‘오도방정’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도 나의 혐오를 담기에 적절하다. 반면 내 애착의 대상, 즉 ‘오토바이’가 아닌 ‘모터사이클’의 운행을 ‘라이딩’이라 불러 보자. 즉 나는 ‘오도바이질’을 혐오하고 ‘라이딩’에 애착을 갖는다.

 

 그런데 이들 둘, 그러니까 혐오와 애착은 얼마나 다른가? 무엇에서 다른가?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도덕적 수용 가능성이다. 오도바이질은 반사회적이다. 시선 한 번 받겠다고 억지로 나의 시선과 청각을 붙드는 작태는 시쳇말로 ‘관심종자’의 짓거리다.  자신의 얄팍한 만족감을 위해 공중의 평화를 깨뜨리다니.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라이딩은? 도덕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운행 소음이라야 순정의 배기음으로 합법적 수준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운행 중에도 교통법규와 차선을 격조 있게 지킨다. 게다가 누군가에게는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일 수도 있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도 선한 영향력의 일종이다. 요컨대 혐오와 달리 나의 애착에는 비도덕적 요소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혐오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정당성을 지니려면 도덕성의 적용 과정에도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의 라이딩에 대한 도덕성을 판단하는 주체도 나 자신이다. 과연 나는 주관성을 극복하고 도덕적 평가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전에 나는 상점에서 비슷한 물건 두 개를 구입한 적이 있다. 내용물은 달랐지만 포장이 똑같아 둘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고, 마침 계산대 안쪽에 점착식 메모지(포스트잇)가 있어 무심코 한 장을 떼어다 포장지 위에 붙였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점원의 입장에서 나는 진상 손님일 것이었다. 자신의 공간을 쑤욱 침투해, 허락도 없이 비품을 사용한 무례한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저 물건을 구분해야겠다는 소박한 생각 뿐이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핵심은 그러한 '의도'가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덕적 이유로 혐오한다고 할 때, 그 잣대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과연 ‘내로남불’이라, 도덕의 기준은 언제나 타인에게는 엄밀하고 나에게는 모호하다.

 

 어쩌면 오도바이질과 라이딩, 즉 혐오와 애착은 의외로 가까운 관계일 수 있다. 앞서 차이점을 말할 때 오도바이질에 비친 관종의 심보가 고약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관종이라 읽어 낸 통찰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 또한 그 ‘심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피우는 남편이 부인의 늦은 귀가를 바람으로 간파하듯이, 시선을 받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남의 오도바이질을 즉각 혐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도바이질과 라이딩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욕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 범주로 묶인다. 오도바이질의 조잡한 소음에도, 일부러 노란불에 멈춰 서는 중후한 라이딩에도, 불특정 다수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몸부림은 똑같이 담겨 있다.


 여기서 조금의 비약을 시도하면, 결국 혐오와 애착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욕망은 어떤 형태로든 행동을 낳는다. 그런데 행동이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는 '규범'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빠져 있을 때, 예를 들어 포장이 똑같은 서로 다른 물건을 어떻게든 구별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타인과 같은 수준의 규범적 판단을 적용하기 어렵다. 그 결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욕망이 내 것은 건전한 애착, 남의 것은 혐오스런 짓거리가 된다.


 결국 혐오는 욕망적 사태다. 욕망하는 바가 없다면 혐오도 없다. 내가 뭔가를 혐오한다면 그 아래에는 어떠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그건 오도바이와 바이크처럼 비교적 동종일 수도, 끝내 갖지 못한 좌절감의 표출일 수도, 타자에 대한 우월 욕망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어떤 사람일 것이며, 외국인 노동자를 혐오하는 것은 대체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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