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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Aug 11. 2022

[오늘의 私설] 선하게 살아야 행복하다


 신학에는 ‘신정론(神正論)’이라는 분야가 있다. 말 그대로 신의 정의를 논변하는 분야다. 신은 전능(全能)하고 전선(全善)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이 있는가? 만약 신도 악을 어찌할 수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만약 신이 악을 허용하는 것이라면 신은 전선하지 않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신정론의 고민이다.      


 역사적으로 신을 변호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잘 알려진 것이 ‘자유의지론’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이 이를 오용한 탓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신은 인간이 악을 극복하면서 성장하길 바랐다는 견해, 신이 인간과 고난을 함께 하기 위함이라는 견해, 신은 아예 선악을 초월한 존재라는 견해 등등, 신정론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견해가 타당한지를 살피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질문은, ‘왜 인간은 신을 변호하려 하느냐’이다. 온갖 논리를 짜내어, 때로는 논리적 비약과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왜 인간은 신이 정의로운 존재라고 항변할까? 쉽게 가려면 ‘전지’와 ‘전선’ 중 하나를 포기하면 그만이다.(실제로 전능성을 포기한 신정론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인간은 끝내 신에게 한올의 티끌도 남기지 않고 싶어한다. 그렇게 해서까지 신을 변호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경향이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나타난다. 성경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나 말씀이 수두룩하다. 예컨대 구약의 <신명기>에는 싸우고 있는 남편을 돕고자 아내가 상대방 남성의 불알을 움켜 쥐었다면 그 여성의 손목을 잘라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데 한 사람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셈으로 손을 내밀어 상대편 불알을 잡았을 경우에는 그 여자의 손을 잘라버려야 한다. 조금도 애처롭게 여기지 마라.” <신명기> 25장 11-12) 그럴 때마다 성직자와 신자들은(그래서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이걸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 애쓴다. 시대적 차이라고 희석하거나, 대를 잇는 것이 중하기에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식이다. 어느 경우든, 신은 문제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일까? 이유를 알기 위해 반대 상황을 가정해 보자. 만약 신이 전능하지도 않고 전선하지도 않다면, 말하자면 모순투성이의 심술쟁이라면, 그러한 신을 믿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절망적이다. 엉터리 왕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백성의 상황과 흡사하다. 가뜩이나 현세의 삶도 힘든데, 마음을 기댈 피안의 세계조차 현실과 다름없이 불완전하다면 너무 막막하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이 부득부득 신의 정의를 변호하고 나서는 것은 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주군이 살아야 내가 산다’는 가신들의 결기에 가깝다.

      

 그렇다면 사실 신정론은 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감히? 신은 인간의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정론은 다만 신의 정의로움을 인간의 말로 이해하려는 노력들이다. 신정론은 신이 정의로운 존재임을 납득함으로써 신을 닮으려는 나의 행위, 즉 인간의 선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인간의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서 시작하자. 인간은 선하고 싶다. 어떤 악인이라도, 이러한 마음의 성향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맹자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4가지 선한 단서(사단 : 四端)를 갖고 있다. 선악의 한 쪽만 갈라 인간의 본성을 논하려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잠시 미뤄두자. 어떻게 하나의 측면만 있겠는가. 다만 악의 늪에도 선의 연꽃은 피어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 선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종교인이라면 그것이 바로 신이 주신 마음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종교를 떠나 좀 더 일반적인 설명을 위해 진화심리학을 빌릴 수 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생존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렇다면 인간의 심리도 집단을 이루고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을 것이다. 사랑, 헌신, 봉사 등이 지고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한 마디로 ‘선(善)’이다. 즉 인간은 선하고 싶고, 이를 위해서는 신을 선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신은 전능해야 한다. 전능은 내가 비는 것을 다 이뤄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신이 끝내 선을 구현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는 마음 놓고 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신의 전능과 전선을 믿는 이유, 그리고 성경의 모호한 구절을 좋게 생각하려는 이유는 우리 안에 그러한 선함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이라면 그 마음을 신이 주셨다고 할 터이고 비종교인이라면 그러한 마음이 신으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할 터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인간은 선함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아갈 때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결론이 중요하다. 세상 모든 종교가 같은 가르침을 주는 이유도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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