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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Aug 25. 2022

[오늘의 私설] '육두품의 신학'을 열어볼까


 신라의 골품제에서 최상위는 성골과 진골, 그 아래가 육두품이었다. 육두품은 신라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편입된 인근의 지배계층들로, 5두품 이하보다야 윗길이었지만 왕족은 아닌지라 17관등 중에서 6등급 '아찬'이 벼슬의 상한선이었다. 이렇게 능력과 불만이 공존할 경우 다른 쪽으로 대성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어서 신라 육두품 출신에는 최치원, 원효, 설총 등 알려진 인물이 많다.


 천 몇백 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성골, 진골, 육두품은 조직 내 위상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위계와 구분짓기를 좋아하는 한국 문화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직장에서는 채용 방식에 따라, 혹은 '라인'에 따라 성골이 있고 진골이 있다. 심지어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에도 본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이 성골, 본교 타과 출신은 진골, 타교 출신은 육두품이었다.


 크리스트교(가톨릭, 개신교 포함) 신앙에도 그런 구분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골품제에서는 핏줄이 등급의 기준이었다면 여기서는 '믿음'이 그 역할을 한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조금의 의심 없이 신을 믿으면 성골이요, 간혹 흔들릴 때가 있을지언정 꾸준히 열심인 이들은 진골일 터이다. 그렇다면 육두품은? 신을 믿는다면서도 확신은 없고 천국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회의를 품는 자들이다.


 신앙의 품계로 따지면 내가 바로 육두품이다. 매일 새벽미사를 나가고 있으니 남들 눈엔 제법 신자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교리의 핵심이라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는 가르침도 나는 마음을 활짝 열어 믿지 못한다. 설마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싶어 가끔 주변에 물어 보면 의심 없이 부활과 동정녀 잉태를 믿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나는 성골이나 진골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육두품도 할 말은 있다. 이천 년 전 중동지역 어딘가의 이야기를 오늘날에도 곧이 곧대로 믿는다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 아닌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성의 공기를 마셨고 합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평생 교육받아 온 내가, 유독 신앙이라는 특정 영역에 들어설 때에만 사고와 심리를 '비합리 모드'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사실 '신앙의 품계'라는 말도 웃자고 한 소리지만, 설령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믿음'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성으로 믿지 못할 바까지도 꾹 참고 믿어야 신이 기뻐하신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 신이 다리를 주었다면 걷는 것이 죄일 리 없고 손을 주었다면 쥐는 것이 죄일 리 없듯이, 신이 이성을 주었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죄일 리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 된 교리에 정당한 의문을 던지고, 합리적이며 현대적으로 그 뜻을 새기려는 사람들을 위한 신학도 필요하지 않을까? 납득하기 어려운 믿음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상식적이고 당연한 질문을 신성모독이라면서 저주와 협박으로 몰아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을 매개삼아 사람들을 신에게로 이끄는 신학 말이다.


 물론 합리적 사고 자체가 언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기에 신에 대한 고민도 그 안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언어의 한계 끄트머리까지는 중생을 논리로 데려 가듯이, 크리스트교에서도 논리와 합리로 신심을 이끄는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육두품의 신학'을 개척해 보는 것도, 신이 준 합리성을 귀하게 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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