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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Jan 19. 2023

[오늘의 私설] 사회 윤리가 없다

사진 : 게티이미지


 황석영 작가를 인터뷰한 글에서 이문열 작가에 대한 그의 언급을 읽은 적이 있다. 한 번은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이완용이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문열 선생이 이렇게 말했단다. ‘이완용이 매국노이기는 하지만 글씨가 뛰어난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자 황선생 맞받기를, “이 사람아, 그러면 일본군 총 맞아 죽은 동학농민군 돌쇠가 죽으면서 '이완용은 명필이다' 외치고 죽겠냐?” (황석영, 『수인1: 경계를 넘다』 에서)     


 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미드 <프렌즈>의 한 장면도 생각난다. 레이첼이 친구 모니카에게 뭔가 배신을 당했는데, 둘의 말다툼 중에 레이첼이 이렇게 모니카를 쏘아붙인다. “오, 미안. 내 등이 네 칼을 다치게 했니(Oh, I’m sorry. Did my back hurt your knife)?”

     

 물론 이완용이 명필일 수도 있고 레이첼을 찌른 칼의 날이 상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팩트 자체가 아니라 팩트 간의 경중, 즉 가치 판단이다. 아무리 이완용이 명필일지언정 매국을 능가할 수 없고 칼날이 상했을지언정 (비유적 표현이지만)신체의 손상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경중 비교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이 더 중하고 덜 중한지에 대한 준거가 있어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하다. 앞의 사례를 읽으면서 별 어려움 없이 황석영 선생과 레이첼의 편에 섰다면 심미적 가치보다는 민족적 가치가, 물질적 가치보다는 생명의 가치가 중하다는 암묵적 합의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사회적으로 합의된 판단의 기준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아니, 있기는 있다. '너도 중하고 나도 중하다'는 기계적 평등론이다. 온갖 사회적 판단의 기준이 여기에 수렴되고 있다.    


 이런 식이다. 주차장이 비좁아 A는 틈새에 차를 억지로 끼웠다. 운전이 서툰 B의 차 바로 옆이다. 새벽에 일찍 나선 B가 난감하여 차를 빼 달라고 전화하자 A는 ‘알아서 빼지 왜 새벽부터 전화질이냐’며 짜증을 내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래, 얼마나 피곤하면 그랬을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너의 출근이 중요하듯 나의 휴식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아주대 의대 이국종 교수님이 <세바시> 에 출연해 응급헬기를 띄우기가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주민들이 시끄럽다며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산에서 다친 응급환자 구조를 위해 헬기가 등산로 주변에 내리자, 등산객들이 '김밥에 먼지가 날렸다'고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물론 김밥은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에는, 생명도 중요하다.


 '내가 왜?', ‘그럼 나는?’ 기계적 평등론 외에 가치의 경중을 따질 만한 사회적 합의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하철에서 남들이 다 비워 둔 임산부 배려석에 냉큼 앉아도 당당하다. '누군 임신 안 해봤냐?' 긴급 환자를 태운 앰뷸런스가 아무리 길을 재촉해도 앞차는 태연하다. '내가 왜?' 갈수록 세상이 팍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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