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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Feb 07. 2023

[오늘의 私설] 산재 사망에 대한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사진 : 뉴시스


 일전에 ‘철학을 배우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었던 제자가(답변 글 https://brunch.co.kr/@latos/118) 이번에는 좀 더 깊은 질문을 던져 왔다. 산업재해와 죽음의 문제다.


 산업 현장에서의 죽음은 매일같이 일어나지만 관심은 미미하다. 작년 10월, SPC 노동자가 소스 배합기에 빨려들어 사망한 사건은 ‘빵’이라는 일상적 소재와 관련되었기에 언론의 주목도가 높았고 이에 따라 불매운동도 일어났다. 하지만 수많은 공사장, 고속도로, 나아가 군부대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녀석의 질문은, 왜 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빵 공장 노동자의 죽음이 부당하다면 공사장과 군대도 마찬가지인데, 이에 대한 대중적 문제 제기가 적다는 비판이다. 질문으로 보내 온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피 묻은 빵을 사먹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논리라면, 수많은 근로자들의 피로 만들어진 아파트, 고속도로, 수많은 군인들의 피로 만들어진 국가안보들도 전부 불매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할 텐데 왜 어떤 사람의 죽음은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애도하는 반면 어떤 사람의 죽음은 그냥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희생, 아무도 모른 채 흘러가는 개죽음인 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죽어나가는 근로자들에 대해 지금껏 무관심해 왔다면, 계속해서 일관된 행동을 유지해야 공평한 것 아닌가요.     


 그러므로 SPC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역시 진지한 문제의식의 결과라기보다는 도덕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일시적 행위일 뿐이라는 게 녀석의 분석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제빵공장에서 23살의 여성노동자가 배합기에 말려들어가 사망한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냥 그 순간 빵을 사지 않는 불매운동을 함으로써, ‘나는 죽은 근로자를 위해 불매운동에까지 참여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야’ 라는 도덕적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는 가십거리로 이용될 뿐이라고 생각되는데, 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질문을 받고는 선뜻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랐다. 너무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인데, 현실은 왜 그렇지 못한가? 이상과 현실은 왜 이리 다른가?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쩌면 당위(이상)와 사실(현실)을 명제의 형태로 정리해 살펴보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명제는 당위명제와 사실명제로 구분할 수 있다. 당위명제란 ‘옳다’, ‘그르다’, ‘어떠해야 한다’와 같이 가치평가를 담은 명제를 말한다. 이에 비해 사실명제는 가치가 개입되지 않은 ‘이렇다’, ‘저렇다’ 식의 객관적 진술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밥은 쌀로 짓는다.’는 명제는 사실명제, ‘밥은 쌀로 지어야 한다.’는 당위명제다.

      

 두 명제는 성격이 다르므로 사실명제로부터 당위명제가 직접 도출되지는 않는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한다.’는 사실명제로부터 곧장 ‘나도 주식투자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면 이 자체는 오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하니까 나도 주식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리는 뭔가 찜찜하지 않은가.


 사실 이 논증에는 하나의 당위명제가 암묵적으로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나도 해야 한다.’이다. 그러므로 위 논증의 온전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나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도 주식투자를 해야 한다.'


 이 논증이 찜찜했다면 중간에 숨어 있던 명제, 즉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나도 해야 한다.’는 당위명제가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장에 간다.'고 부화뇌동을 비웃지 않았나. 이처럼 '사실'로부터 도출된 '당위'가 설득력이 있는지 살피려면, 그 중간에 숨어 있는 명제의 타당성을 살펴야 한다.

      

 같은 관점에서 학생의 문제의식을 명제로 정리해 살펴볼 수 있다. 녀석의 주장은 ‘여러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이들에 대해 일관된 관심이 필요하다.’ 였다. 여기서 ‘여러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명제다. 반면 ‘일관된 관심이 필요하다.’는 명제는 당위명제다. 앞서 말했듯 사실명제로부터 곧장 당위명제가 도출될 수는 없으므로 이 사이에 숨은 당위명제를 찾아 보아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모든 죽음에 일관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가 깔려있다.    


 그렇다면 이 명제는 타당한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인지 능력과 체력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죽음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어도 역량이 충분치 않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며, 자식을 키우거나 부모를 봉양하는 동안 낯선 이의 죽음에 일일히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의식은 현실과 당위의 간극을 성토하는 것으로부터, 현실의 범위 안에서 당위적 목표를 모색하는 것으로 옮겨 와야 한다. 이를테면 모든 죽음에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관심을 갖는 부당한 죽음에 대해서라도, 그리고 항상은 아니겠지만 간헐적으로라도 관심을 기울일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작은 부분적, 간헐적 실천들이 모여 빚는 힘을 신뢰해야 하지 않을까.        


 설령 그 동기가 '도덕적 허영심'이라 할지라도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실천’이라고 할 때, 그 허영심이 문제의식을 실천으로 전환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내 젊은 날 독서의 가장 큰 동기는 지적 허영심이었는데, 덕분에 오거서(五車書)는 안되어도 거서 는 읽어 제낀 듯하다. 억울한 산업 현장의 비극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 또한 도덕적 허영심에 대한 경계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도덕적 허영심일 수 있는 것이다.


 허(虛)가 실(實)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점이 면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 스무 살 청춘에게는 쉽사리 와닿지 않을 수 다. 내게도 그건 여전히 미스터리다. 다만 조금 더 살아 본 삶의 경험칙으로 거시와 미시가 불이(不二)라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에 비해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 만큼은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다. 아무튼 녀석의 순수한 분노와 풋풋한 문제의식이 참으로 장하다. 혹시 별명이 김정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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