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계엄 당일 쓴 글에서, 나는 윤석열 씨가 일종의 '자폭'을 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 나는 나의 판단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매일매일 갱신해야 했다.
우리가 '합리성'이라 부르는 개념은 맥락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궁리할 때의 합리성은 '도구적 합리성'이다. 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때 사용되는 합리성은 '성찰적 합리성'이라 부른다.
나는 윤석열 씨가 두 가지 합리성을 가진 사람이라 전제하고 그가 왜 계엄을 선포했는지를 추론했다. 민주당 의원의 요구만으로도 해제될 것이 뻔한 계엄을 선포했다면, 그것이 만약 '도구적 합리성'이 있는 행위라면, 그 이유는 자신의 직무 집행상 책임으로부터 스스로를 놓아버리기에 계엄이 적절한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고 이러한 '자폭'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당선에 정치적 지분을 가진 이들에게 휘둘리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더 이상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그가 '성찰적 합리성'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계엄 선포는 성찰적 합리성에 기반한 우국 충정은 커녕 극우 유튜브에 함몰된 광기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광기를 휘두르기 위하여 모의하고 실행했던 계엄의 과정들 역시 - 물론 실패로 돌아간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 그의 광기를 실현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기능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성찰적 합리성도, 도구적 합리성도 없었던 것이다.
이번 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인간은 상대방에게 얼마나 대화의 여지를 기대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서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려면 상대방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설령 생각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생각의 '방식'은 비슷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처럼 대화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합리성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전제마저 어긋난다면? 상대방의 합리성에 호소하는 이켠의 합리성이, 혹은 상대방의 인간성에 호소하는 이켠의 인간성이 헛소리가 되고 말 뿐이라면? 도구적 합리성도 성찰적 합리성도, 의사소통적 합리성마저도 없는 자가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나라에서 국민으로 살기란 상당히 비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