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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說] 무안공항에서 '쓴 맛'을 생각하다

by 김정환

* 사진: 무안공항


나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일 수 있었을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덮고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 군중은 될 수 있었을까.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무살 때 나섰던 쌀시장 개방 반대 시위와 연결지어, 내게도 그 정도 참여 의지는 있다고 새가슴을 달랬다.


하지만 12월 3일 계엄군이 국회로 침투하던 모습을 TV로 보면서도 나는 여의도로 달려가지 않았다. 여당 대표도 계엄을 반대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회로 모여드는 상황에서 곧 계엄해제가 되겠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저길 간다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새가슴'과는 또 다른 얘기다. 나 하나 참여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영화 <1987>의 대사,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와 같은 맥락이다. 예상대로 나 없이도(?) 계엄은 해제되었다. 손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니 쾌재를 불렀을까. 그게 그렇지 않았다. 여의도에 가지 않고도 계엄 해제를 얻은 건 '가성비' 높은 선택이었을 텐데도 입 안엔 뭔가 쓴 맛이 돌았다.


그러다 무안공항 참사가 발생했다. 황망히 떠난 영혼들, 유가족과 지인을 위로하기 위해 조문객이 줄을 섰다. 나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얼른 들었다. 불의의 참사에 넋을 잃은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지지와 애도다. 그런데 다시 발걸음을 잡아채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었다. '네가 가서 꽃 한 송이 올린다고, 그게 그들에게 위로가 돼?' 너무나 맞는 말에 또 한번 주춤했다.


그럼에도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쓴 맛을 거듭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너무 '맞는 말'인데도 그 결과가 찜찜할 수 있다는 걸 불과 며칠 전에 경험하지 않았던가. 유가족에게 어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알량한 자기 위안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찾아가 보아야 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1월 2일, 서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다섯 시간쯤 걸려 무안공항에 도착하자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색하게 차를 세우고 두리번거리는데 이미 삼삼오오 공항을 향하는 발걸음들이 보였다. 다소 안심이 되면서,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뭔가 뭉클하다.


공항 내부는 유가족 쉼터와 자원봉사자들의 부스, 기자와 조문객들로 꽉 찼다. 사진 촬영과 SNS 게재를 말아달라는 손팻말을 지나 분향소를 향했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뒷줄에서 헌화하고 잠시 묵념을 올렸다. 고인의 대부분은 위패로만 모셔져 있었고 몇 분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데, 그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눈을 꼭 감았다.


공항의 가운데 공간에는 유가족의 쉼터가, 벽쪽 사무용 공간에는 심리상담, 의료지원, 법률지원 센터 등이 자리를 잡았다. 각종 종교단체, 사회단체에서 준비한 자원봉사 부스에 음식과 물, 각종 생활 필수품이 누구나 가져갈 수 있도록 쌓여 있었다. 이분들의 활기 덕에 공항 내의 분위기가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그러다 한 봉사 부스 앞에 섰다. 음료와 요깃거리 옆에 성경 <시편>과 <잠언>을 묶은 책자들이 놓여 있었다. 한 권 가져가라고 권하시는 봉사자님과 잠시 말씀을 나눴다. 기독교 봉사단체로, 유가족과 함께 기도하며 필요한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했다. '함께 기도하는 것',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여기서 방점은 '함께'에 있다. 홀로 하는 기도와 또 다른, 함께 하는 기도만의 힘이 있다. 그 '함께'를 위해 이 분도, 다른 봉사자들도, 조문객들도 무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감사하다는 인사로 자리를 뜨려는 내게, 봉사자님은 도리어 감사의 인사를 돌려 주셨다. 지지와 격려가 봉사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공항을 나서며 그 봉사자님의 인사 속에서, 나는 무안행 발걸음을 잡아채던 냉소에 맞설 답을 찾았다. '네가 꽃 한 송이 올린다고 그게 그들에게 위로가 돼?' 그래, 된다. 위로가 된다.


나는 어떤 '위로'를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마치 성직자쯤 되는 것처럼, 울부짖는 손을 붙잡고 유가족의 등을 쓰다듬는 장면을 떠올렸을까? 누군가를 위로하는 순간에마저 내가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었다. '함께, 함께, 함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돕는 한 부분에만 끼어들 수 있어도, 이를테면 유가족의 곁에서 기도하는 분께 지지와 격려를 보내 드리는 것만도 이 참사를 견뎌내는 '함께'의 힘에 포함된다. 봉사자들, 추모객들, 전국에서 물품을 보내 온 사람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함께' 남은 이들을 위로하고, 그렇게 우리는 고통의 산을 '함께' 넘어가는 것이다.

결국 '왠지 가봐야 할 것 같다'던 첫 마음이 옳았다. 무언가 주저될 때일수록, 에컨대 어떤 행위가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얼른 그려지지 않더라도, 혹은 (계엄 선포 날처럼) 너무 그려져서 손익계산 뒤로 물러앉고 싶을 때라도, 내 얕은 이성을 넘어서는 내면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그러면 살면서 '알 수 없는 쓴 맛'은 덜 볼 수 있지 않을까.


깊이 애도하며, 삼가 무안공항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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