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대도시 문화일 뿐이다. 생극면 인근에는 성탄절 분위기를 느낄 만한 꺼리가 전혀 없다.
발바닥엔 물집을 넘어선 피멍이 들었다. 경험상 통증은 익숙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뉘는데 발바닥 통증은 불행히도 후자다. 그럴 때는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조심스레 관리하는 게 최선이다.
생극면 주변은 공장지대다. 당연히 아침에도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공장 들밥 배달전문'이라니, 현장 노동자들을 위한 출장도 되는 모양이다. 인심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께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아침을 먹는 동안 KBS '아침마당'이 방송중이다. 올해 1년간 가장 인기를 끌었던 출연자 특집, 이름하여 <명불허전>이다. '연상연하 인기 커플'로 다시 나온 부부는 남편이 48, 부인이 61세다. 남편 성격이 워낙 유쾌한데, 부인이 일하는 미용실에서 손님들 흥을 돋우다 음반까지 냈다고 한다. 남편이 노래를 부르자 부인이 조용히 앨범을 들고 서툰 백댄서가 된다. 그 모습이 어쩐지 뭉클하다.
오늘 목적지는 경기도 안성이다. 벚나무가 늘어선 강둑길을 걷는다. 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 앞 조형물은 음성의 특산물을 정말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발의 감각에 유의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하루에 견딜 만한 통증의 양은 대략 정해져 있다. 통증의 그릇이 어지간히 찰 때까지는 그런대로 걸을 만하다가 찰랑찰랑해지면 견디기 힘들다. 무리하지 않으면 그릇을 천천히 채울 수 있다.
다행히 어제보다 날이 조금 풀렸다. 몸을 덜 움츠릴 수만 있어도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길에서 '큰바위 얼굴 테마파크'를 만났다. 담장 너머엔 얼굴 석상이 늘어서 있다. 누구나 알 만한 동서고금의 위인들이다. 테마파크의 창립자는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큰바위 얼굴'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읽은 줄거리가 아직 또렷하다. 한 소년이 사는 마을의 뒷산에 위대한 사람의 얼굴 모습이라 전하는 바위가 있었다. 소년은 전설을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나이들어 존경받는 노인이 된 소년의 얼굴이, 햇살에 비친 그 큰바위 얼굴과 똑같더라는 얘기다.
요즘 학생들도 이 얘기를 아는지, 안다면 어떤 의미로 맏아들일지 궁금하다. 한때 '큰바위 얼굴'은 '얼큰이(얼굴이 큰 사람)'를 놀리는말로 쓰였다. 동의어로는 '모여라 꿈동산'도 있었다.
갈 길이 멀어 들어가보지는 못했으나 언젠가 로시난테(나의 모터사이클 애칭)를 타고 가 볼 생각이다. 위인들의 숲에서 뭔가 영감을 얻을 것도 같다. 박노해 시인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박노해 <사람만이 희망이다> 중에서)
비교적 조용하던 길에 개짖는 소리가 들려 온다. 양철 담장 너머로 개장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대부분의 개농장은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여기는 담장이 낮아 까치발로 엿볼 수 있었다.
카메라로 당겨 본 개들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녀석들은 식용으로 팔려갈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수의대에서 생체실험을 할 때도 개농장과 거래하는 일이 잦다고 한다.
개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간과 교감을 나누는 능력이 다른 동물보다 강하게끔 진화해 왔다. 그런 이유로 식용으로 개를 취급하는 데에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개 뿐만 아니라 어떤 동물이든, 그 동물을 죽여 고기를 발라 내는 과정을 본다면 쉽게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를 잡는 모습을 봤다면 소를, 돼지 멱을 따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돼지를 멀리 할 것이다.
맹자(孟子) 양혜왕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양혜왕이 어느날 새로 만든 종에 피를 바르는 의식(이를 '흔종'이라 한다)을 위해 끌려가고 있는 소를 보았다. 소가 구슬피 울자 왕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저 소를 살려 주어라'고 명했다. 아랫사람들이 '그럼 흔종을 폐지할까요' 묻자 '전통을 폐지할 수는 없으니, 양 한마리를 잡아다가 그리 하여라'고 명했다.
이 말을 들은 맹자는 '왜 소는 안 되고 양은 됩니까?'라고 묻고는,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한다. 소가 슬피 우는 모습은 왕이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갖는 윤리의식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어떻게 개를 잡아 먹느냐고 분개하는 사람은 개와 가까운 사람이다. 돼지를 반려돈으로 키우는 사람이라면 삼겹살을 멀리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까다로운 문제가 남는다. '나의 개'에 대한 애착은 좋다. 그런데 그러한 취향을 개라는 종 일반에까지 확장하는 건 당연한 일일까? 그렇게 '확장된 선호'가 사람들의 생업과 충돌할 때에는 무엇을 우선으로 삼아야 할까? 쉽게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다만 내 얘기로 마무리하자면, 적어도 눈 마주친 저 녀석들은 먹지 못할 것 같다.
이제 이천으로 들어선다. 이천부터는 경기도다. 심리적으로 서울에 한층 다가선 느낌이다. 경기도라는 이름 자체가 서울(경 : 京)의 주변(기 : 畿)이라는 뜻이다. '기'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일정 반경 이내의 지역을 일컫는 한자다.
여담이지만 명문 '경기고등학교'의 명칭도 이 '경기'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다니는 '경성중학교'가 '경성'이라는 이름을 쓰자 조선인들이 주로 다니던 '관립중학교'는 '경기중학교'로 교명을 정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해방 후 경성중학교가 폐지되면서 그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바로 나의 모교다.
길가에는 지금 걷는 이 길이 '영남길', 즉 영남대로임을 알리는 간판이 서 있다. 멀지않은 곳에 어재연장군 고택이 있다.
어재연 장군은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때 강화도에서 각각 프랑스와 미국 군대를 맞아 분전한 조선 말기의 장군이다. 최근 역사강사 설민석씨가 퍼뜨린 "미미광어(신미양요-미국-광성보-어재연)"에도 등장했다.
장군은 신미양요에서 전사했고 장군의 깃발('수(帥)자 기')을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던 수자기는 2007년 '장기임대'의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사진출처 : 우리역사넷)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불쑥 고라니 사체가 나타났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온전한 형태의 고라니 사체를 본 건 처음이다. 오늘 만나는 네 번의 죽음 중에서 이 고라니가 첫 번째였다.
털에는 서리가 앉았다. 뒷면까지 살펴본 건 아니나 뚜렷한 외상의 흔적도 없다. 이 녀석이 어떤 경로로 여기에 쓰러져 있는지, 아무래도 수수께끼다.
한 가지 가설은 인근 농가에서 이 녀석을 잡거나 발견한 후 길가에 갖다 놓았다는 것이다. 농가에서 처치하기 어려운 사체를 이렇게 길가에 버려 놓으면 도로를 정비하는 분들이 치워 주실 것이다.
안타까운 광경이 이어진다. 고라니 사체를 본 지 정확히 10분만에 두 번째 죽음을 만난다. 사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도로 위로 남은 흔적이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길은 도로 폭에 비해 통행량이 많다. '영남대로'의 일부인 만큼 이 근처에서 서울로 향하는 가장 효율적 경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동물이 살기 좋은 야산이 많은 것 또한 로드킬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로 추측된다.
야트막한 산을 끼고 돌던 구불구불한 길을 벗어나, 시원하게 펼쳐진 평지로 들어선다.
길가에 걸어둔 현수막이 재미있다. 흔히 손님이 지나치게 에누리를 요구하면 '누군 흙 팔아 장사하는 줄 아느냐'고 응수하게 마련인데, 정말로 흙 팔아 장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다른 현수막에는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담겼다. '똥공장'이란 음성군에서 나오는 가축 분뇨처리시설을 말한다. 그런데 그 위치가 이곳 이천시 율면과 가까워 음성에서 발생한 가축분뇨 처리의 피해를 이천시 율면 주민들이 받게 된다는 얘기다. ("지자체 경계 혐오시설 건설 수난당하는 이천시", <하나로신문> 2018. 11. 15. 참고) 혐오시설에 대한 주민의 반발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이곳의 항의는 제법 일리가 있다.
길가에 누군가 솟대를 세워 놓았다. 장승과 비슷한 마을의 수호 상징물이다. 삼한시대 소도에서부터 있었으니 지극히 한국적인 구조물이다. 솟대 위의 새는 하늘과 땅을 잇는 전령을 상징한다.
야산을 끼고 도나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세 번째 죽음을 맞는다. 선명하게 남은 핏자국 옆에 '동물사체수거용 봉투'가 놓여 있다. 이런 봉투가 따로 제작되어 있다는 것은 로드킬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의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자마자 폴짝폴짝 도망친다. 그렇게라도 차도에서 멀어졌으니 다행이다. 부디 도로에서 참혹한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
12시 반경, 이천을 벗어나 안성시로 접어든다.
도로변에 위치한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섰다. 뚝배기 불고기를 주문했다. 낮부터 고기를 굽는 가족의 모습도 보인다.
한낮을 지났지만 햇살이 강렬하다. 차가 많이 오가는 많은 국도를 따라 걷는다. 이렇게 통행량이 많은 대로변은 걷는 재미도, 사색의 꺼리도 덜하다. 그저 빨리 벗어나길 바라면서 터벅터벅 나아갈 뿐이다.
죽산교차로에서 큰길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슬레이트 지붕의 오래된 창고 건물에 '멸공', '방첩'이라 씌여 있다.
90년대 이후 출생에겐 익숙지 않은 어휘일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유년을 지냈던 70, 80년대에는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반공에 스웩을 더한 것이 '멸공'이다. '반대'를 넘어 아예 없애버리자는 화이팅을 담았다.
'방첩'은 간첩을 막는다는 뜻이다. 곳곳에 '이런 사람은 간첩으로 의심되니 신고하라'는 게시물이 붙어있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건 '군복에 농구화를 신은 자', '바짓단이 새벽 이슬에 젖은 자', '오랜만에 나타나 돈을 많이 쓰는 친척' 등이다.
그 사이 세월이 흐르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멸공'과 '방첩'의 살벌한 어감도 추억의 소재가 되었다.
죽산면 매산리로 접어든다. 근처에 지명을 딴 '매산리 석불입상'이 있다. 마침 걷고 있는 길 바로 옆이다. 길가 나무에 지금 이 길이 영남길의 한 토막임을 알리는 리본이 달려 있다.
매산리 석불입상은 '태평미륵'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이 근방에 미륵신앙이 강해 미륵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석상도 그 중 하나로, 관리들이 묵던 '태평원'근처에 있어 태평미륵이라 불렸다.
머리 위에 얹힌 모자(?)는 '보개'라 부르는 장식이다. 비바람으로부터 석상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보개의 높이가 높은 건 고려시대의 특징이다. 이 미륵보살은 고려시대에 송문주, 김윤후 장군을 기리며 만들어졌다. 검지를 위로 올려 든 오른손의 모습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소원을 들어주는 '여원인(與願印)'이다.
미륵불 뒤쪽에는 사람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미륵불을 갉아 먹어 움푹 패인 곳이 있다. 밀양에서 만났던 고인돌과 같은 맥락이다. (3일차 삼랑진~밀양편 참조)
노란색으로 표시한 안쪽, 움푹 들어간 부분이 사람들이 '긁어 먹어' 생긴 흔적이다.
오늘 일정을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대로변을 따라 걸어야 한다. 여기는 차들이 더 빠르게 지나간다.
바로 그 때, 이날의 마지막 죽음과 마주쳤다. 정황상 이번엔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대상은 고양이로 추정됐다. 사체 외에도 사체로부터 터져 나왔을 무언가가 나뒹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자세히 볼 용기는 없었다.
멀찍이서 사진을 찍은 후, 차량이 잠시 뜸하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현장을 지나쳤다. 지나던 차가 사체를 밟아 그 잔해가 내게 튈까봐서였다. 그 참혹한 모습에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대로변 내내 두근대던 가슴이 마을길로 접어들자 조금씩 가라앉았다. 마을 게시판에 손으로 적어 둔, 아마도 이장님이 썼을 글씨체가 정겹다.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꽤 남았다. 앞에 보이는 찻집으로 들어섰다. 50대 초반의 주인 아저씨께 고구마라떼를 주문했다. 따뜻한 잔을 움켜 쥐고 지는 해를 바라 본다.
앞자리에 '사주 봅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주인 아저씨의 겸업이다. 평소 사주공부를 하면서, 간간이 손님들께 풀이도 해 드린다는 것이다.
평소 점이나 사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지금은 여행중이 아닌가. 이것도 인연이고 경험일 것이다. 복채는 3만 원이라고 했다. 오케이, 한 번 봅시다!
주인장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올 초에 돈을 좀 쓸 일이 있을 것이며, 그 돈의 효과는 가을쯤 나타날 것이다. 둘째, 근래 몇 년간 인생에서 힘든 일들을 겪었을 터인데, 이제 어지간한 고비들은 다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인생 후반으로 갈수록 좋아지는 운세다.
마지막까지 얘기를 듣고, 웃으면서 '아니, 그럼 나빠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었어요'하자 주인장은 정색을 하신다. '없는 말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간혹 노년 운이 나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무엇을 조심하라고 말하지 굳이 '좋다'고 말을 지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 정색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찻집을 나서 저녁을 먹으러 인근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다.
앞 테이블의 아저씨 일고여덟 분은 화기애애하게 말씀들을 나누시더니, 내 된장찌개가 나올 때즈음 갑자기 행사 모드로 들어갔다. 아마 계모임인 듯한데, 사회자가 "국민의례는 생략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면 애국가라도 부를 분위기였다. 인사말씀부터 회계보고로 이어지는 흐름은 여느 공식석상 못지 않았다.
식당을 나와 캄캄한 길을 더듬어 숙소로 향한다. 정말 가로등도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걷는다.
드디어 저 앞에 오늘의 숙소로 삼은 모텔이 보인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어두운 주변과 대비되어 눈에 확 띄었다.
본래 모텔(motel)이라는 말은 미국에서 자동차(motor)를 타고 다니는 여행자가 들를 수 있는 숙소(hotel)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운전자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간판을 내세우는 게 모텔의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 모텔은 '여관'보다는 한급 위, '호텔'보다는 한급 아래의 숙박 형태로 자리잡았다. 운전자보다는 남녀를 타겟으로 하면서 알록달록한 때때옷을 입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밤의 모텔은 그야말로 환상과 환락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낮에 보이는 모텔의 외관은 민낯의 무용수같은 느낌을 준다.
신을 벗고 들어서자 '에구구구'소리가 절로 난다. 약간 서늘해도 깨끗하다.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방이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말에 담긴 흥겹고 에로틱한 뉘앙스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의 잔재다. 이날엔 통금이 해제됐기 때문이다. 일찍 집에 가도 되지 않아도 되는 연인들이 모처럼의 자유를 놓치기 아까워 괜시리 서성대다가 밤새 함께 할 수 있었던, 일년에 몇 안 되는 날이었다. 석가탄신일에도 통금이 해제됐는데,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연인의 밤에는 '인간의 탄생'이라는 공통의 정서가 흐른다.
내일이면 용인, 모레면 분당이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금방인 줄 알았더니그렇도 않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길에서 보내는 하루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픈 발을 끌고 수고가 많았다. 느긋하게 드러누워 TV를 보다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