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차 : 경기 안성 일죽면에서 경기 용인 김량장까지

2018년 12월 25일

by 김정환


성탄절 아침, 날이 흐리다. 휴일이라 도로도 한산하다.



근처 식당에서 우렁제육쌈밥을 주문했다. 휴일 아침엔 식사가 쉽지 않은데 든든히 먹을 수 있어 감사하다. 다만 주인 내외분의 표정이 조금 어둡다 싶더니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가게를 내 놓았다는 표지를 보았다.


개업과 폐업의 이유는 여러가지다. 개인적 이유일 수도, 경기의 영향일 수도 있다. 다만 여행 중 들른 어떤 식당에서도 장사가 잘 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용인시로 접어든다. 오늘의 목적지는 용인시 김량장동, 경전철 에버라인의 '김량장역' 근처다.



물류센터가 많이 보이면 수도권에 진입한 것이 맞다. 지금 걷는 길 좌우로 물류센터들이 늘어서 있다.



백봉 교차로에서 빠져 318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길도 한산하고 보행용 갓길도 널찍한 것이 걷기에 더없이 좋다.



하지만 여기서도 로드킬은 피할 수 없었다. 오늘은 고라니같은 큰 동물보다 고양이가 많다. 마치 잠든 듯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발바닥의 분홍빛마저 선명하다.



로드킬을 줄이려면 기본적으로 운전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동시에, 동물이 자주 출몰하는 도로변에 울타리를 설치하거나 생태 통로를 만드는 등의 가시적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동물이 감지할 수 있는 음파를 이용한 스마트 장벽도 개발 중이라고 들었다.


근처에서 만난 떠돌이 개는 한 눈이 애꾸인데다 뒷다리 한쪽을 절고 있다. 인간에게 해를 입었기 때문인지 개들끼리의 싸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건, 잔뜩 주눅이 든 채 바닥에 코를 박은 녀석의 모습이 안쓰럽다.





비교적 조용하고 단조로운 길이 오전 내내 이어졌다. 어느덧 점심나절이다. 점심은 원삼면에서 해결하면 될 것 같다. 지도에 면사무소와 성당이 표시된 걸 보면 식당도 몇 군데 있을 것이다.


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면 단위에는 '번화가'라 해도 저층 상가건물 몇 동이 전부다. 원삼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하나로마트가 있는 걸 보면 일정 규모의 주거지가 있는 듯하다. 마트에서 물을 두 통 사고 점심식사를 할 만한 식당을 물었다. 물 한 통에 200원인가 300원인가 했다. 편의점 PB상품 500원이 제일 싼 줄 알았더니, 더 싼 물이 있었다.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맞은편 테이블을 정리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남은 김치를 잔반과 섞지 않고 접시 위에 얹어 조심스레 되가져갔다.


알면서 모르는 척, 적당히 행하고 넘어가는 게 반찬 재활용이다. 쌈장에 고추씨가 섞인 모습은 흔하다. 더 이상 재활용되기 어려운 김치는 찌개로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일차적으로는 식당 주인의 잘못이다. 그러나 같은 값에 '푸짐함'을 선호하는 음식 문화도 공범이다. 손님은 끌어야 하고 단가는 높일 수 없다면 식당 주인은 재활용의 유혹을 거부하기 어렵다.


이날 된장찌개를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김치에 손을 대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 내 다음 손님에게 그나마 손이 덜 간 김치를 제공한 셈이다.



가까이에 원삼성당이 있다. 명색이 천주교 신자인데(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성탄절에 성당을 들르지 않을 수 없다. 2005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으니 이날은 정확히 13주년 되는 날이다.


고백하자면 주일 미사에 빠진지 오래다. 교회 활동을 하지 않는 신자를 천주교에서는 '쉬는 교우'라 부른다. 신자에게 성탄절 미사 참례는 의무사항인데 오늘도 나는 '쉬고 있는' 셈이다.


특별히 신앙에 회의를 느껴서는 아니다. 주말에 일을 하는 특성상 강의를 마치고 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주일 미사를 한두 뻔 빠지기 시작했고, 그게 굳어졌다.


실은 교회의 가르침에도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죄인'으로 규정해야 하는 교리가 와닿지 않았다. 딱히 지은 죄도 없는데 매번 '내 탓이오'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 고백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물론 내가 죄 없이 살았다는 건 아니다. 죄인임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불편했을 뿐이다. '죄를 지었구나' 싶으면 주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성당을 찾아 고해성사를 하고 보속기도를 바쳤다.


이런 내게 누군가는 '자신이 죄인임도 깨닫지 못하는 교만한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도 있겠다. 부인하지 않는다. 그나마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고 성호를 긋는 건 최소한이나마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노력이다.



성당 내부는 조용했다. 구석자리에 앉아 지금껏 무사히 걸어온 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묵상한다.





마을을 벗어나는 한적한 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마주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여행자의 여유'로 인사를 건네려는데, 저쪽에서 먼저 '안녕하세요' 한다.


낯선 사람과의 눈인사는 순수한 교감이다. 흐뭇한 잔향이 남는다. 하지만 이 좋은 것을 여행지가 아닌 일상에서, 또 외국인 아닌 한국인에게 하기는 왠지 어색하다. 익숙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익숙함'은 '닫힘'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약간의 고갯길이 나왔다. 경사가 급하지는 않다. 나중에 보니 이 길은 인근의 사찰 '와우정사' 앞을 지나며 드라이브 길로도 유명하다.



오르막의 정상에는 지명을 알려주는 정류장 표지가 있었다. '곱등고개'다. 터널을 지나면 내리막이 쭉 이어진다.



한참 내리막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간 시간에 비해 내려오는 시간이 너무 길다. 걷는 입장에선 다행이지만 에너지 보존법칙에 위배되는 일이 아닌가?


이런 경험은 다음 날에도 있었다. 용인에서 분당으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올라간 '비용'에 비해 내려가는 '편익'이 훨씬 컸다.


비밀은 바로 '동고서저'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를 동서의 축에서 보면 서에서 동으로 걷는 셈이다. 영동지방을 제외하면 서쪽으로 갈수록 지대는 기본적으로 낮아지게 마련이다. 그 옛날 한국지리에서 들었던 '동고서저'의 참뜻을 온몸으로 다시 배운다.



산길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와우정사의 입구를 지난다. 가보지는 못했으나 다양한 불상과 볼거리로 이름난 사찰이다.





길 옆에 작은 개천이 흐른다. 경안천의 상류인 운학천이다. 천변으로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마침 경안천과 도로가 비슷한 궤적으로 이어지고 있어, 그때그때 자전거길과 도로를 오가면서 걷는다.


그러던 중 도로변에서 '운학동 돌방무덤' 표식을 만났다. 한참 들어가야 했다면 발이 아파 그냥 지나쳤겠지만 다행히 바로 길 옆이다. 잠시 둘러보기로 한다.



돌방무덤이란 말 그대로 돌을 사용해 방과 입구를 만든 무덤이다. 안내판에는 이 무덤이 만들어진 시대, 무덤의 형태, 축조 방법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설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유추컨대 '산돌'은 '흩어진 돌', '할석'은 '자른 돌', '횡혈식'은 '옆으로 구멍을 낸 방식', '시상'은 '시신을 올려놓는 판'인 것 같다. 그러나 '내경시킨', '궁륭상'의 뜻은 아무리 읽어봐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궁륭이란 아래 그림처럼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눈 듯한 아치 형태를 일컫는다. 궁(穹)은 '하늘', 륭(窿)은 '활'을 뜻하는 한자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내경시키다'는 말은 사전에 없다. 다만 총신이나 파이프 등의 안쪽 지름을 '내경'이라 하니, '내경시킨다'는 말은 '내부를 둥근 형태로 만든다'는 뜻으로 추측된다.


정리하면, "할석으로 둥그렇게 내경시켜 쌓아올린 궁륭상의 횡혈식 돌방무덤"은 "돌을 다듬어 내부가 둥근 아치형이 되도록 쌓고, 옆으로 통로를 낸 돌방무덤"이라는 뜻이다.


대체 이 안내판을 누가 읽으라고 세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연구자들은 익히 쓰는 용어일 터이나, 길을 걷다 우연히 들른 일반인들에게 그런 전문용어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넌더리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운학천은 다소 폭이 넓어지면서 '경안천'이 되었다. 날이 흐리고 춥다 싶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 내리는 경안천변




한 시간 이십 분쯤 더 걸었을까, 저 앞에 용인 송담대학교가 보인다. 송담대는 용인 시내에서 볼 때 끝자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시내의 김량장동도 여기서 멀지 않다.



경안천은 용인 시내로 들어오면서 한층 폭이 넓어졌다. 산책로까지 갖추어 도심 하천의 모양새를 제대로 갖췄다.



'김량장'이란 이름은 옛날 '김량'이라는 장수에게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용맹한 장수로 유명했기에 그가 살던 동네를 '김량'으로 불렀고, 김량에 들어선 장은 '김량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롭지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보다는 정양화 용인향토문화연구소장의 설명이 설득력 있다. 정 소장에 따르면 본래 '금령'으로 불리던 지명이 한강 이남에서는 '금'을 '김'으로 부르던 풍속에 따라 '김량'으로 변했다. (정양화, "김량(金良)의 유래", <용인시민신문>, 2008. 10. 02.) 지금 지나는 도로가 '금령로'인 점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전설 속의 장은 아직도 서고 있다. 5일과 10일에 열리는데 마침 오늘은 성탄절인 25일이다. 큰길 안쪽으로 장 구경을 나선 사람들이 빼곡하다. 혼자서 먼길을 걸어 온 처지라 복작복작한 모습에 공연히 설렜다.



일단 시내의 사우나부터 찾았다.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두 시간가량 몸을 풀고 나니 비로소 여유가 생긴다.


저녁식사를 위해 본격적으로 근처 탐방에 나섰다. 5일장인 김량장 외에도 이곳에는 상설시장 '용인중앙시장'이 유명하다. 제법 규모가 큰데, 골목마다 전문성을 강화한 것이 재미있다. 이쪽 골목에는 순대와 족발가게가, 저쪽에는 통닭집이 모인 식이다.



시장은 벌써 파장 분위기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인근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만두가게를 찾았다. 저녁꺼리로 제격이었으나 시간이 늦어 포장만 가능했다. 고기만두와 김치만두를 하나씩 샀다.



맛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프다. 문을 닫은 시장의 어느 가게 앞에 서서 뚜껑을 열고 몇 개 맛보았다. 김치만두가 맵다는 것을 제외하면 개인적으로 특별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저녁은 해결한 셈 치고 만두가게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맥주를 파는 커피집'이라니, 혼자서 간단히 한 잔 하기엔 안성맞춤이다.



건너편 테이블에는 외국인 커플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들어선 손님들도 외국인이다.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주문을 받고, 그사이 가게를 나서는 커플에게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물론 주문도 인사도 다 한국말이다.


지방의 다문화는 서울과 결이 다르다. 단적으로, 서울의 다문화가 영어 기반이라면 지방의 다문화는 한국어 기반이다. 서울에서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반면 지방에서는 밭일하는 할아버지부터 식당 아주머니까지 외국인과 대화를 나눈다.


또한 지방에서 외국인은 갑을 관계를 넘나든다. 저임금 계약에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는 점에서 을이지만 지역 상인들에게는 손님이고 갑이다. 상대적으로, 서울의 외국인들은 어디서나 대우받는다.


바로 이런 점들이 지방 소도시의 독특한 지역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물리적 섞임을 넘어선 화학적 융합이 진행 중인 것이다.


서울 가까이에서 이런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안산의 원곡동이 제격이다. 안산역 건너편의 '다문화거리'에는 말 그대로 다양한 사람과 물건, 분위기가 공존한다.


안산의 다문화거리 (촬영 : 2019년 4월 4일)


카페를 나와 근처에서 숙소를 물색, 적당한 모텔을 찾아 들어섰다. 방은 크지 않지만 따뜻하다.



용인까지 오니 확실히 서울이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방심하기엔 이르다. 최종 목적지인 서울역까지는 아직도 50km 이상 남았다. 평소의 '수도권'은 교통수단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지금처럼 온전히 두 발로 걸어내려면 서울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다.


지도를 검색하며 내일 일정을 그려 본다. 용인, 분당, 판교를 지나 서울로 향할 터인데, 판교까지면 시간이 남고 서울까지는 무리다. 중간은 없다. 판교를 벗어나면 양재 근처까지 아무것도 없는 경부고속도로 옆길을 따라 북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이가 15km에 이른다.


더구나 발의 상태를 고려하면 강행군은 무리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내일의 목적지는 판교에서 가까운 분당 수내동으로 결정했다. (판교에는 적당한 숙박 시설이 검색되지 않았다.) 거리는 23km 정도. 모처럼 여유 있는 일정이 될 것이다.


분당은 매우 익숙하다. 처음 강의를 시작한 곳이 수내동이었다. 짧게 모터사이클을 탈 만한 코스로도 제격이다. 내일은 내 집처럼 오가던 정자역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 잔 해 볼 생각이다. 추레한 행색이지만 마음만은 뿌듯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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