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보다 일찍 일어났다. 어제 먹다 남은 만두로 아침을 대신한다. 김치만두는 보기보다 맵다. 빈 속에 매운 음식이 들어가자 속이 약간 쓰렸다.
숙소가 있던 골목을 벗어나 금학천변으로 올라서면 에버라인이 보인다. 한 량짜리 경전철이 앙증맞고 귀엽게 지나간다.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에버라인과 거의 일치한다. 동백, 강남대를 지나 에버라인의 종점(동시에 기점)인 기흥에서 분당 방향으로 걸어 올라갈 예정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산을 넘고 물을 건넜는데 이제부터는 도시의 상업시설과 주거단지가 쭉 이어진다. 이 추세는 서울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도시가 이어져 만들어진 대규모 군집체를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라 부른다.
여기는 용인의 구 시가다. 신도시로 개발된 동백이나 수지에 비해 구 시가엔 개발과 미개발이 공존하고 있다. 한쪽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위락시설이 들어섰지만 멀지 않은 곳에 옛날식 개인주택의 전형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한참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나야 도보여행 중이라 해도 앞서 가는 아주머니는 보행자가 드문 이 길을 벌써 30분 가까이 걷고 계신다.
삼가역 앞 횡단보도에서 잠깐 멈춰 선 아주머니께 다가가 어인 일로 이토록 걸으시는지 물어보았다. 사실 이것도 여행이 주는 용기다. 일상에서라면 속으로 궁금할지언정 마차 묻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행 첫날, 심부름 서비스 아저씨게 전화를 걸어 '기억에 남는 일'을 물어본 것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별 경계 없이 운동삼아 걸어서 출근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 맞은편 '돈까스oo'을 가리키며 '한 번 식사하러 오라'고 웃으며 길을 건너 가신다. 엉뚱한 질문 덕에 유쾌한 교류가 남았다.
삼가역을 지나 용인시민체육공원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상당히 규모가 큰 경기장이 보인다. 2017년 11월에 준공되었다니 아직 새 시설이나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딱 한 시간 걸었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숨을 돌린다.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질 예정이다. 정류장 전광판에도 일기 예보가 떴다.
그런데 이때 사달이 났다. 아침부터 빈속에 들어간 매운 음식(만두)이 아무래도 속을 계속 자극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급작스레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길 건너 대규모 체육시설에는 화장실도 넉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면서 관계자에게 화장실을 물으니 '무슨 구역 몇 번 출입구까지 가야 한다'는 답을 들었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 4만여 석 규모의 종합운동장을 빙 둘러 걸어 올라가는 길은 체감적으로 300미터가량 되었다. 더운 땀이 아니라 점점 식은땀이 났다.
최악의 순간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긴박감이 올려오던 순간, 드디어 출입구를 발견하고 무사히 위기를 벗어났다. 이번 여행 최대의 고비는 거창하거나 신기한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사진은 '당연히' 경기장 입구로 되돌아 나올 때 찍은 것이다. 경기감독관 등이 사용하는 곳이어서인지 화장실 시설이 매우 훌륭하다.
크게 한숨 돌리고 경기장을 빠져나와 걷던 길로 올랐다. 이 고개를 넘어가면 용인 동백지구다. 여기서도 '동고서저'를 체감한다. 오르막은 잠깐이지만 내리막은 한참이다.
햇살이 강해 가급적 에버라인이 만드는 그늘 아래로 걸었다. 아파트와 상가 단지, 공원이 적절한 배치로 이어졌다.
점심때가 되었다. 어정역 근처 맥도날드로 들어섰다. 서울까지 거진 다 온 마당에 새삼 별미를 찾을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제일 비싼 메뉴로 스스로를 토닥인다.
강남대학교 앞을 지나간다. 강남대는 사회복지 관련 학과가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사업학과를 최초로 개설한 곳이다. 서울 강남에서 시작된 '강남사회복지학교'의 교명이 용인으로 캠퍼스를 옮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년 전이다. 친구가 자신이 일하는 복지시설에 4년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뇌성마비 학생이 있다고 해서 서류와 면접지도를 해준 적이 있다. 그 학생이 강남대 사회복지학부에 진학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몸은 불편하지만 밝고 열정이 있는 친구였다. 그 열정으로 비슷한 처지의 불편한 사람들에게 선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에버라인의 종점(기점) 기흥역 근처에는 고층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기흥역에서 우회전하여 성남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분당이 나온다.
신갈역 근처에서 발에 통증이 와락 몰려왔다. 이렇다 할 휴게시설이 보이지 않아 근처에 있던 기흥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 앞마당 벤치에서 신발을 벗고 잠시 쉬었다. 쌀쌀하지만 바람이 세지 않아 햇볕을 등지고 있자니 그런대로 포근하다.
다행히 오늘은 일정에 여유가 있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도 된다.
앞에 보이는 굴다리는 영동고속도로를 관통한다. 영동고속도로가 강릉에서 서울방향으로 달리다가 경부고속도로와 만나는 지점이 신갈이다.
굴다리를 지나자 카풀에 반대하며 분신한 택시기사를 추모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카풀 문제는 소유경제와 공유경제의 대립, 조금 더 넓게 보면 기술발전에 따른 경제 구조의 변화와 갈등이다.
여기부터는 낯이 익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나던 길이다. 저 언덕을 넘어가면 보정역이 나올 것이다. 보정역부터는 지하철 분당선과 이 길이 일치한다. 분당을 관통해 성남 구 시가를 거쳐 서울 잠실까지 이어진다.
보정역 앞에서 잠시 쉰다. 저 아래에 죽전 신세계백화점이 보인다. 자주 보던 광경이지만 느낌이 새롭다.
이 또한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여행 중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것을 계속 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동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된다. 새로운 것에 감탄할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익숙한 대상에 대해서도 '새삼스러운' 감탄을 느낄 수 있다. 한 마디로, 여행은 '낯설게 하기'의 좋은 기회다.
죽전역이다. 대로변 다이소에서 대일밴드를 한통 사고 근처 아울렛단지 화장실에 앉아 물집 처치를 했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오리역 방면으로 걸어 올라간다.
오리역과 미금역 앞은 분위기가 비슷하다. 신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상가건물이 밀집해 있다.
위 사진이 오리역, 아래가 미금역 앞이다.
미금역까지 왔다. 4시쯤 되었다. 아침은 만두로 때웠고 그나마 배탈로 비워낸 후에 햄버거 하나로 걸어 왔으니 몹시 출출하다. 미금역 근처 떡볶이집에서 떡볶이와 튀김세트를 주문했다. 예전에 친구와 한 번 와 본 적이 있다.
4시 50분경 정자역 스타벅스 앞에 도착했다.학원과 가까워 한때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던 추억의 장소다.
카푸치노 한 잔을 들고 2층에 앉았다. 그때와 구조와 분위기는 똑같다. 묘한 감상에 젖어 주변을 둘러본다.
잠시 쉬는 동안 오늘의 숙소를 물색했다. 검색 중 판교에 있는 중국식 마사지샵을 발견했다. 전화로 물어보니 마사지를 받은 후 그대로 잘 수 있다고 한다. 국토종주의 마지막 밤이다. 그동안 뭉친 근육도 풀고 숙박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예전 학원 원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마침 시간이 괜찮다고 하시기에 수내역 근처에서 만나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유쾌한 담소를 나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연 하나하나가 소중하단 생각이 든다. 어릴 때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정한 나이가 지나고 나서야 내 삶을 통틀어 의미 있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총 수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들과 (미루지 말고) 한 번 더 만나고, 한 번 더 이야기 나누고, 한 번 더 웃는 것이 결국은 잘 사는 삶이다.
수내역 부근의 모습이다. 날이 추워지고 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오늘 밤부터 이번 겨울 최강의 한파가 온다는 예보가 며칠 전부터 반복됐다. 판교로 가는 길에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마사지샵은 IT기업이 밀집해 있는 '판교테크노벨리' 단지의 건물 2층에 있다. 근처 IT기업에서 늦게까지 일하다 여기서 자고 곧장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중국인 아주머니가 마사지를 해 주셨다. 자신이 '조선족'이 아닌 '한족'임을 강조했는데, 한족은 자신들이 중국의 주류라는 자부심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족과 한족의 처지가 뒤바뀌어 한족이 '소수민족'이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차별받던 조선족들이 한족에게 앙갚음을 하면서 양측 간에 충돌이 종종 벌어진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마사지가 끝나고 잠을 자려는데 조금 춥다. 가뜩이나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데다 천정이 뚫린 칸막이식 방이라 난방 효율이 떨어졌다. 전기장판에 납작 몸을 맞대어 잠을 청한다. 국토종주의 마지막 밤, 이것도 재미있는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