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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Jul 25. 2019

[오늘의 私설] '보수'동 책방골목


 부산에 갈 때마다 들르는 곳,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운명의 책을 만날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다. 헌책방은 대형 서점에 비해 분류가 느슨하다. 게다가 출간 시점이 다양한 책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말하자면 종적·횡적 질서가 흐릿한 셈인데, 우연 혹은 운명적 만남에 대한 기대는 그런 데서 높아지게 마련이다. 준비된 결혼정보회사의 만남보다 뜻밖의 모임에 흥분되듯이.


 그런데 오랜만에 찾은 책방골목엔 그사이 변화가 많았다. 가장 규모가 크던 책방 자리를 신축 건물이 밀어냈고, 셔터를 내린 채로 비워 둔 가게가 즐비하다. 북카페나 감성 사진관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데, 이 와중에 골목 입구엔 책방골목임을 알리는 조형물 공사가 한창이니 아이러니컬하다.


 무언가가 난 자리엔 무언가가 들 것이다. 단순 셈법으로는 아쉬움과 설렘이 상쇄될 터, 마음에 동요가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설렘에 대한 기대보다는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 한결 크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가뜩이나 동네 이름도 '보수동'인데, '책방', '골목'이라는 정겨운 말까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다.


 하지만 찰나를 사는 내가 아쉬워할 뿐, 세상은 그런 식으로 계속 변해 왔을 것이다. 내가 익숙한 모습들도 그 전 세대의 서운함 위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보수동에 처음 헌책방들이 들어서던 시절, 조용한 골목을 아껴 오던 주민들은 점점 번잡해지는 이 곳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들의 아쉬움이 나의 설렘이 되었다. 이젠 내가 그걸 놓아줄 차례다.


 언젠가 이 곳을 다시 찾았을 때 골목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경제 상황을 보나 책을 읽지 않는 세태를 보나 분위기의 반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틈새에서 북카페든 사진관이든 새로운 시도는 다시 움틀 것이고, 그것이 보수동의 색깔을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다. 어쩌면 그게 진짜 '보수'동의 이름값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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