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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환 Aug 15. 2019

[오늘의 私설] 클럽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음 (촬영 : 2018년 11월 2, 대전)



 친한 동생 중에 '클럽의 달인'이 있다. 흥겹게 춤을 추며 놀다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다가가 자연스레 이야기를 건네고 쉽게 동행이 된다. 나로서는 경이롭기만 하다. 저것이야말로 하나의 예술(art)이 아닌가!


 나 또한 아름다운 여성에게 마음이 동하는 건 인지상정, 어쩌면 저분께 다가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운이 좋으면 다음번 만남도 기약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럴 용기가 없다.


 언제쯤이면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여러모로 '궁리'해 보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미 답을 안다. 그런 때는 아마도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인간을 포함, 세상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존재는 그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행복할 수 있다. 펜은 잘 써지는 순간에, 칼은 배추를 잘 썰 때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을 구현해야 하는데, 이는 '용기', '절제'와 같은 덕목을 말한다.


 '탁월함'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유명한 '중용'이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컨대 비겁함과 무모함은 둘 다 극단적인 태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사이의 중용을 취함으로써 '용기'라는 탁월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중용은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그의 답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용기 있게 행동하면 된다. 절제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절제를 하면 된다.


 바로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함으로써' 탁월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궁리로써' 용기를 그리거나 생각으로 절제해서는 탁월함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바대로의 행복에 영원히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수많은 현자들이 실천과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제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보다 생각의 범위가 훨씬 넓거나 훨씬 좁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고 가까이는 '어렵습니다'를 습관처럼 늘어놓는 부하 직원들에게

 '해 보기나 했어?'라고 일갈하던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그랬다.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는 생각과 실천의 관계를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한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다시 클럽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 위해 해병대 캠프를 수료해야 하는  아니다. 클럽에서만이랴. 용기는 용기를 행함으로써 갖출 수 있는 것일지니, "그러니 좋다,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헤르만 헤세, <생의 계단>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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