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私설] 46살 생일에, 제주도 짙은 밤
작년 생일에는 강의를 하고 있었다. 추석 특강 중이었다. 학생들에게 초콜릿을 돌렸다. 연휴에도 고생하던 녀석들과 생일도 없이 일하던 나, 서로에게 격려의 의미였다.
그 전년도 생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렇다. 하지만 오 년 전 생일은 기억한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 갖고 들어가 함께 먹었다. 그보다 2년 전까지는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그렇게 했다.
어릴 땐 생일이 나를 위한 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태어나는 데에 나는 아무 한 일이 없었다. 해산의 고통은 어머니의 것이었고 임산부와 식솔의 생계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나의 탄생이 기쁨을 드렸기에? 하긴 들은 바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이라는 소식에 병원을 뛰쳐나가 고추가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돌아오셨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고추도 내가 단 게 아니다.
그래서 철든 후부터 생일은 부모님과 함께 하는 날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부모님 좋아하시는 주전부리를 같이 먹으며 드라마나 뉴스를 보는 게 다였다. 어머니는 주로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상체를 든 채 TV를 보셨고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다리를 포개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거실이 넓어졌고, 또 어느 때부터는 소파가 길어졌다.
문득 10년 전 오늘이 생각난다. 부모님을 모시고 경북 울진의 덕구온천에 갔다. 부모님은 온천을 좋아하셨다. 내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던 나이였다. 10년이 지나 나는 마흔여섯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고추 넥타이를 매셨던 때보다 한 살이 많다. 나보다 동생이었던 아버지는, 그리도 좋았던 모양이다.
오늘 제주도에 왔다. 짬을 내어 내게 주는 생일 선물이다. 부모님과 함께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마 산방산 탄산온천을 좋아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먼 길에 ‘되다(힘들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며 그냥 호텔방에 드러누워 계셨을지도. 아마 제주도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배를 깔고 상체를 일으킨 채 누나들에게, ‘제 딴에는 잘해주려고 하는데 노인은 힘들어’라며 흉인지 칭찬인지 모를 후일담을 남기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미소 짓고 계셨겠지. 제주도의 밤이 그리움만큼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