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입학 예치금 43만 원을 입금했다.
나 이제 대학 간다. 47살에 20학번 새내기로.
이 거대한 사건의 발단은 이솝우화의 한 토막이었다. 어떤 운동선수가 자신이 '로도스'라는 섬에 있을 때 엄청 잘 뛰었노라고 뻐겨댔다. 그러자 누군가 말하길 "아니, 자네가 그렇게 잘 뛴다면 여기가 로도스섬이라 치고 한 번 뛰어보시게나(Hic Rhodus, hic salta :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나에게는 논술이 그랬다. 논술 강사를 제법 해 왔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논술로 대학에 가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반대로 논술이 정시전형이었고, 그에 앞서 수능과 내신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특차전형'이 있었다. 나는 논술을 하기 싫어(?!) 특차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갔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내 강의에 권위를 인정하는 건 출신 대학, 석사 학위, 그리고 그간의 강의 경력 때문이다. 물론 대학이 원하는 글은 '논술'이나 '논문'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논술 시험장을 거쳐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확실했다.
게다가 논술은 경쟁률이 높다 보니 내 강의에 대한 피드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대하던 학생이 떨어지고, 기대하지 않던 학생이 붙기도 한다. 설령 떨어져도 강사를 원망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어찌 보면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직업적 양심의 문제다. 내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이솝 우화에서처럼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그렇게 논술을 잘 하면 당신이 직접 해 봐!'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올해부터 연세대가 논술전형에서 수능을 반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서울대와 고려대가 논술을 폐지했기에 연세대는 '논술의 정점'이다. 그런데 수능까지 반영하지 않는다? 그건 한 마디로, 누구든 논술 한 방으로 연세대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열 분위기는 연초부터 감지됐다. 고3뿐만 아니라 이미 논술로 서성한(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에 진학했던 '선수'들도 연세대 논술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나의 강의를 점검해 보기에 연세대는 안성맞춤일 것이다.
학과는 당연히 (일반적인 수험생과는 반대로) 경쟁률이 제일 높은 곳으로 택했다. 보통 연세대에서 경쟁률이 가장 높은 단위는 심리학과다. 올해도 다행히(?)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7명 선발에 591명이 지원, 84.43대 1로 연세대 인문계열 최고를 기록했다.
10월 13일,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시험장에 갔다. 올해는 연세대 강좌를 따로 열지 않았으나 학원에서 오가며 얼굴을 익힌 학생들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떨어지기라도 하면 망신 아닌가? 복면가왕의 심정으로 북새통 캠퍼스를 조심스레 걸어 올라갔다.
시험 전엔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방식대로만 쓸 것. 둘째, 고등학생이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문장은 사용하지 않을 것. 학생들이 쓸 수 없는 지식이나 문장을 사용해 답안을 작성한다면 설령 합격하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나로서도 내 직업적 토대를 점검해 볼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시험장을 나서자 이미 어두웠다. 애타는 마음으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들의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사실 나도 저 무리 속의 한 명인 것이, 사회적 관점에서는 더 자연스러울 일이었다.
이후에는 파이널 강의에 바삐 지냈다. 고려대 특기자 구술면접을 시작으로 성균관대 논술, 중앙대 논술, 고려대 학교추천 2 면접, 고려대 일반전형 면접 강좌로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발표일인 12월 10일이 왔다. '설마'와 '혹시나', '만약에'와 '어쩌면'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수험번호를 누른 뒤 생년월일을 넣었다. 불합격이면 나이가 많아서 떨어뜨렸나 보다고 변명할까, 순간 얕은 꾀가 스쳤다.
결과는 다행히 합격. 누군가는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방식 그대로 이뤄 낸 결과였기에 내 나름으로는 직업적 소양과 양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로도스에서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말로써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뛰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애초 시험에 응시할 때에는 결과만 확인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할까, 슬슬 공부에 대한 욕심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중년에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가 인생에서 뭔가 의미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상징하는 물건은 '바가지'다. 바가지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우고 비우면서 이 켠과 저 켠을 연결한다. 그간 논구술 강의와 함께 글을 써 온 것도, 비록 떨어졌지만 재작년에는 공학박사 과정(카이스트 문화기술 대학원)에 도전했던 것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누면서 세상의 다리가 되겠다는 내 삶의 지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심리학 또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경쟁률을 보고 택하기는 했지만, 심리학은 평소부터 깊은 관심을 두던 분야다. (공학박사도 심리학과 연계된 '인지 아키텍처' 분야를 지원했다.) 심리학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현재의 논구술 강의를 더 풍성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원래 전공인 정치학과 접목시켜 흥미로운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변화와 도전, 성찰과 소통이라는 내 삶의 키워드와 잘 맞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찌 보면 아마추어들의 경기에 프로가 난입한 격이다. 나로 인해 어떤 학생은 합격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저간의 사정 변경으로 생각이 달라졌노라고 변명한들 아쉬움을 달래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합격자 안내문에 따르면 12월 13일 오후 4시까지 예치금 43만 원을 입금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등록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예비 번호를 받은 학생에게 기회가 돌아간다. 입금할 것이냐 말 것이냐, 스마트폰을 들고 숫자를 입력한 상태에서 나오고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이틀을 지냈다.
그렇게 오늘(13일) 낮까지 고민하다 결국 예치금을 넣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다. 그 학생이 좋은 인재로 성장하여 우리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 역시 더욱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이 기회를 절대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그 학생 못지않게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에 기여하겠다고, 마음으로 깊이 약속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대학생이 된다.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마흔일곱이다. 하지만 나이에 대한 거리낌은 없다. 매너리즘에 빠져들기 쉬운 인생의 중반 어딘가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는 사실을 소중히 받아들인다. 다만 '고연전'이냐 '연고전'이냐, 그게 헷갈릴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