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환 Jan 14. 2020

[오늘의 私설] 중용(中庸)의 방법론


 ‘중용’은 동서를 막론하고 중시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으로서의 탁월함을 구현하는 길로 중용을 제안한다. 공자는 때에 맞게,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태도라고 중용을 규정했다. 중용을 통하여 인간은 탁월성에 이르거나(아리스토텔레스) 군자가 될 수 있다.(공자)  


 문제는 이분들도 ‘중용하기’의 구체적 방법까지는 제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비겁''만용' 사이에서 중용으로 달성된 탁월함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용기 있는 자는 어떻게 될 수 있는가? 즉 '어떻게 중용을 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용기 있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면 공부를 잘하라는 식이다. 이건 동어반복이다. 적어도 ‘세 번 이상 교재를 반복하라’ 거나 ‘8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라’, 하다못해 ‘마늘주사로 체력을 유지하라’ 정도는 나와야 할 것 아닌가?


 방법은 목적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용을 제안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탁월했으나 그 방법론은 탁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나설 차례다. ‘중용하기’를 위해 중용을 곰곰이 따져 보면 그 안에 세 가지 요소가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첫째는 ‘조망’이다. 중용은 극단을 피한다. 그런데 그것이 극단인 줄은 어찌 하나? 유일한 방법은 물러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재에 매몰되지 않는 메타인지(metacognition: 자신이 아는지 여부를 아는 인지능력), 대립되는 관점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를 ‘객관적 사고’라 하자.


 둘째는 ‘판단’이다. 판세를 조망한 후 어느 쪽에 나의 힘을 기울여야 할지 결정하는 과정이다. 공자는 중용을 ‘시중(時中)’으로 이해했다. 상황에 맞게 힘을 기울여야 할 곳을 아는 판단력이다. 대개는 약자를 돕겠지만 때에 따라 강자의 편을 들 수도 있다.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역량과 가치판단에 좌우된다. 그러므로 이를 ‘주관적 사고’라 하자.


 셋째는 ‘행동’이다. 객관적으로 살펴 주관적으로 판단을 내렸다면, 자신의 결정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스펙트럼의 어디쯤에 자신의 힘을 보태야 한다. 여기서 나아가지 못할 때 이른바 ‘입보수’, ‘입진보’의 길로 들어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용기 있게 행동하기’의 뜻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를 ‘실천’이라 하자.


 이처럼 중용은 객관적 사고와 주관적 사고, 그리고 실천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중용하기’란 이 세 가지를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고는 생각이고 실천은 행동이니, 결국 ‘중용’이라는 한 마디 안에 생각하고 실천하는 존재, 인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중용이 강조됐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논구술 강의] 국어와 논구술, 독해가 잘 안돼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